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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

Ⓒ Enwan Photograph, NANJING LINEAR ARCHITECTURE, Water in the mirror, Flowers like the moon 아치 건축 기술의 꽃, 아치(Arch) 아치는 두 개의 기둥을 떨어뜨려 세워놓고, 그 위에 쐐기 모양의 돌(홍예석)을 곡선형으로 쌓아놓은 형태의 구조물을 말한다. 조각조각 분리된 홍예석의 상호 압력으로 상부의 하중을 지탱하거나 중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며, 비어있는 공간이 있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형태가 유지된다.아치의 이런 구조에 주목한 건축가들은 오래전부터 아치 구조물을 활용해 건축물의 출입문과 창을, 심지어는 사람과 마차가 지나다니는 교량까지 만들어냈다. 로마의 콜로세움과 무굴제국의 타지마할, 파리의 개선문과 경주의 석굴암에 이르기까지. 텅 비어있음에도 하중과 중력에 저항하고 있는 아치와 그 신비로운 힘은 인간 건축 기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 Alexander Angelovskiy, SVOYA Studio, Hello Baby Ⓒ Enwan Photograph, NANJING LINEAR ARCHITECTURE, Water in the mirror, Flowers like the moon 인류 최초의 인공 아치 구조물이 무엇인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와 중국에서도 아치를 만들어 건축물에 사용했던 흔적이 발견됐다. 문명 초기의 아치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불규칙적인 곡선형의 돌, 진흙 등이 빈 공간을 떠받치고는 있지만 막대한 하중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완성도 있는 구조물은 아니었다. 아치가 대형 건축물에 쓰이면서 홍예석을 표준화하는 등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은 로마제국 시기부터다. Ⓒ Andriy Bezuglov, YOD Design Lab, NĂM • Modern Vietnamese Cuisine 로마의 콜로세움은 인류의 역사, 문화, 건축학적으로 가장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다. 서기 70년, 플라비우스 왕조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10년 뒤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된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 188m, 최소 지름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로, 약 9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그리고 콜로세움에는 총 80개의 아치 구조물이 활용됐다. Ⓒ OTD Corp, 적당 赤糖 거대한 콜로세움은 사실 온통 아치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토록 많은 아치로 콜로세움을 설계한 까닭은 아치야말로 이 육중하고 거대한 경기장의 하중을 견디기에 가장 적합한 구조물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이룩한 아치 구조물의 지식은 서유럽의 로마네스크 건축, 비잔틴 건축의 기본 형식이 되었고, 중세 프랑스와 영국인들은 석조 아치 교량 등으로 아치에 대한 기술과 지식을 더욱 발전시켰다. ⓒ Saurabh Suryan, Lokesh Dang, RENESA, Feast India Co. 아치는 주로 건축물의 출입문, 창문에 활용되는 구조다. 이로 인해 아치는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서는 관문’으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아치는 그 구조적인 특성으로 인해 힘과 지지, 개방성과 신비로운 힘을 상징한다. 이 상징성은 자연스럽게 종교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전 세계의 수많은 신전, 사원, 성당에서는 아치 구조물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최고 신 제우스를 상징하는 기호로 아치를 선택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딘지 신비롭고 우아한 모습의 아치를 통해 신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했으며, 아치형 관문을 지나 신전에 들어선다는 것은 세속을 벗어나 신들의 공간, 신성하고 엄숙한 공간으로 다가간다는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 Ⓒ Xiaokai Zhang, SEEING JEWELRY, Pures Design 석재보다 튼튼한 콘크리트와 장력이 있는 강철이 건축재로서 주목받게 된 이후, 우리는 건축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치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늘날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치는 주로 상징성과 심미성을 위한 구조물이다. 아치는 직선과 직각이 대부분인 건축물, 공간에서 이지적이면서 아름다운 느낌을 자아낸다. 과거 건축 기술력의 꽃이었던 아치는, 이제 그 상징성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공간의 꽃이 된 것이다. Ⓒ Casa de São Lourenço Ⓒ Norm Architects, Cabinetmakers' Autumn Exhibition 2016 인간 건축 기술의 꽃, 아치다.

Bathroom

Ⓒ Nordic Design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숙면? 물론 중요하다. 세상에 잠을 자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쉬어야 한다. 식사? 당연하다. 식사는 아름다운 맛과 풍부한 식감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일임과 동시에 몸에 꼭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행위이다. 물론 지식을 습득하거나 탐구하며 자아를 성찰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 Ⓒ ABK Native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배설과 목욕이다. 배설과 목욕은 무척이나 다른 단어다. 하나는 무척이나 비위생적인 듯하고,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를 깨끗이 정돈하기 위해 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역사와 시간을 거치며, 이 두 행위는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을 화장실에서 하며, 마무리 역시 화장실에서 한다. : Ⓒ MORAN GOZALI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얘기한다. “인간의 역사는 곧 화장실의 역사이다.” 화장실은 그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공간이며, 유적을 발굴할 때 수세식 화장실의 존재가 문명 발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인도의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유적은 물 위에 배설을 할 수 있는 구조였고, 바빌로니아 우르의 유적에서는 분뇨와 물을 함께 내려보내면 땅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이었다. : Ⓒ 상아타일 로마시대는 공중화장실이 발전했던 시기였다. 비누 대신 소변으로 빨래를 했던 세탁업자들은 길가에 그릇을 세워놓고 소변을 받아가기도 했다. 당시 로마에만 400여 개의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중세와 근대에는 ‘공간’의 개념이 주춤했다. 대체품은 요강이었다. 요강에 볼일을 마친 후, 창 밖으로 그것들을 모두 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화장실은 집에 없어서는 안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 Ex.t 씻는 행위는 현대인들에게 무척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과거에는 씻는 행위가 모두에게 필수적인 일은 아니었다. 1세기 로마인들은 여러 온도의 물에 몸을 담그며 찜질을 하고, 긁개로 땀과 기름을 닦아낸 뒤 온몸에 기름을 발랐다. 17세기, 프랑스 귀족에게 ‘씻는 행위’란 셔츠를 꼬박 꼬박 갈아입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한층 더 나아가 유럽인들은 씻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페스트 때문이었다. 역병은 물을 두려워하게 했고, 창궐이 사라진 뒤에도 물을 멀리하는 관습이 약 400년이나 유지되었다. : Ⓒ 상아타일 그리고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이는 민족 간의 우열을 가르는 요소로 여겨졌다. 일본은 기후 특성상 자주 몸을 씻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했고, 서로 다른 위생관을 비교하며 그것을 자신들이 우월한 증거라 여겼다. 나치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나치는 유대인들의 불결을 그들이 열등한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지금도 이방인을 보고 코를 막으며 눈썹을 찡긋거리는 것은 아주 강력한 인종차별의 시그널이다. : Ⓒ COEM 씻는 행위가 일상이 되고, 욕실도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미국식 건축의 영향을 받은 한국은 욕실과 화장실을 한 데 놓았으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국가들과 유럽 건축에 영향을 받은 일본 등 국가는 대개 욕실과 화장실을 분리해 놓았다. 배설과 목욕을 통해 우리는 보다 더 가볍고 깨끗한 몸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다. : Ⓒ VOGANI 욕실은 우리에게 안식처이며, 고민을 훌훌 내려버리는 장소다. 샤워를 하면서 흥얼흥얼 나 스스로를 위한 공연을 펼치고, 뜨거운 물을 맞으며 오늘 있었던 나쁜 일을 흘려버리기도 한다. 욕실에서 몸을 씻고 영혼을 위로하며 깨끗해지고, 또 가벼워진다면 더욱 나은 하루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발코니

Ⓒ BD Barcelona - POLTRONAS SHOWTIME 발코니 실내로 들어온 실외 공간 우리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인 동물인지는 발코니, 베란다 등의 실외 생활공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추위와 포식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방에 벽을 두르고 하늘을 막았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잠기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 밤하늘의 별빛을 보기 위해서였다. 발코니는 우리의 주거 환경에서 실내/실외를 연결하는 건축적 장치 중 하나다. 마당이나 정원은 외부 생활을 하기 위한 본격적인 공간이라면, 발코니나 베란다는 실내와 실외, 그 중간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Space Copenhagen - Howard Hotel, NY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발코니라는 용어가 가장 대표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발코니와 베란다는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발코니는 2층 이상의 건축물에서 건물 벽면 바깥으로 돌출된 Cantilever를 가지며, 난간이나 낮은 벽으로 둘러싸인 뜬 바닥으로 상부 지붕 또는 천장이 없다. 한편, 베란다는 건축물 실내에서 툇마루처럼 튀어나오게 하여 벽 없이 지붕을 씌운 부분을 총칭한다. 우리의 집 안 여러 공간에서도 발코니와 베란다에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는 공간은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이용하는 응접실, 식사 시간의 운치를 더해주는 다이닝 공간, 하루를 마무리하는 침실이다. 그러나 발코니와 베란다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의 주거 환경에서 꼭 필요한 공간 중 하나이며, 오랜기간동안 건물의 안팎에서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부터 우리의 집에 발코니와 베란다를 구성하고 이용하기 시작했을까? Ⓒ Bruce Damonte - Zack | de Vito Architecture + Construction - HillSide House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발코니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학자들은 약 2,000년 전,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에서 발코니의 특징을 발견했다. 당시의 발코니는 거주자의 여가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주거 생활에 있어서 없어선 안될 구조물이었다. 그리스의 무더운 지중해성 기후와 두꺼운 석벽의 건축물에는 자연광의 유입과 내부 공기의 순환을 위해 발코니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 Toshiyuki Yano Photography - Tomohiro Hata Architect & Associates - Floating Hut 중세 성(城: Castle)에서의 발코니는 조금 다른 기능을 수행했다. 하수처리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성벽에서 돌출된 발코니는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사람들은 이곳을 화장실로 사용했다. 온갖 배설물은 자연스럽게 성 주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한편, 근대 건축가 Eugéne Emmanuel Viollet-le-Duc은 현대의 발코니가 중세의 호딩(Hourd: 성채에서 공성전이 발생했을 때 방벽 외부에 설치하는 목조 구조물)에서 파생됐다고 주장했다. 수성하는 병사들은 호딩에서 무거운 돌과 뜨거운 기름을 부으며 공격 측의 군대를 막아냈다. Ⓒ Oded Smadar - MORAN GOZALI - L.S House 발코니가 현대와 비슷한 용도, 목적으로 사용된 것은 18세기부터다. 유럽의 건축가들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는 큰 창을 내고, 건물 외부에 난간을 두른 형태의 Juliet 발코니를 고안해냈다. Juliet 발코니는 주거 공간에서 실외 생활을 하기 위함보다는, 외부를 실내로 들여오는 방식의 발코니라 할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Juliet 발코니가 유행처럼 번지며 사람들은 온갖 방식으로 외부에서 바라본 그들의 집에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갔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Romeo and Juliet에서 Capulet가(家) 저택의 모델이 되었던 Verona의 Casa di Guilietta에는 Juliet 발코니가 없다는 것이다. Romeo의 세레나데를 듣고 Juliet이 그를 내려다본 것은 French 형식에 가까운 발코니에서였다. Ⓒ Josefotoinmo - OOIIO Architecture - GAS House 발코니는 의식, 예식의 공간이라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 콜로세움의 발코니 maenianum에서는 황제와 원로들이 경쟁하는 검투사들을 구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Adolf Hitler는 Vienna 시청의 발코니에서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Benito Mussolini는 Venice 궁전의 2층 발코니에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했다. 한편,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파사드 한가운데 ‘강복의 발코니’ 라는 공간이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콘클라베를 통해 새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교황이 발코니 아래에 모인 신자들에게 축복을 전한다. Ⓒ BD Barcelona - AMBIENTADA 2015 대지가 넓어 단독주택이 널리 보급된 미국에서는 발코니보다 정원을 가꾸는 데 공을 들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발코니를 꾸미는 데 시간과 정성을 쏟고있다. 발코니는 외부에서 주거 공간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고 눈에 띄며, 세대주의 안목과 취향, 경제 수준까지도 짐작게 하기 때문이다. 볕이 좋은 날, 발코니의 라운지에 앉아 느긋하게 쉬어본 적이 있는가? 또, 사랑하는 사람과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캄캄한 밤거리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발코니라는 공간에서의 기억은 어쩐지 운치 있고 낭만적인 느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명확한 경계가 없이 모호한 공간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많은 것들을 느낀다. Ⓒ Bruce Damonte - Zack | de Vito Architecture + Construction - HillSide House 가장 낭만적인 경계의 공간, 발코니다.

사각형

: Ⓒ Kaschkasch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 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을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1996년 발매된 W.H.I.T.E의 3집 Dreams Come True의 타이틀곡, ‘네모의 꿈’ 가사의 일부다. 이렇게까지 보지 않아도, 우리의 세상은 사각형으로 오밀조밀 덮여 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모니터, 워드 프로세서의 창, 혹은 당신이 이걸 읽고 있는 잡지까지. : Ⓒ Kaschkasch 사각형은 네 개의 꼭지각을 이루고 있는 네 개의 선분으로 싸인 평면을 뜻한다. 설명은 어렵지만, 네 개의 선과 네 개의 꼭지점이 있는 도형이면, 우리는 보통 사각형이라고 부르곤 한다. 사각형이라고 해서 직사각형과 정사각형만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마름모, 사다리꼴, 평행사변형, 화살촉꼴 등 다양한 형태와 모양의 사각형이 있다. 정사각형이 여러 개 모이면 정육면체가 된다. 원기둥은 어떤 면에서 보면 마치 직사각형처럼 보인다. 우리곁에서 이렇게나 다양한 형태,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해온 사각형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 Ⓒ Raw Edges 사각형이 가장 많이 보이는 곳은 ‘건물’이다. 건물 대부분은 사각형이 연속된 형태를 띠고 있다. 내부 벽면 역시 사각형이다. 천장 또한 넓은 사각형 면을 하고 있다. 사각형으로 건물을 만드는 이유는 여러가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삼각형, 아치형, 혹은 원형보다 훨씬 건축하기 쉬워서일 것이다. 건축뿐 아니다. 직삼각형 형태로 된 지붕 아래 옥탑방에 가보면, 누구나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생활의 반경 자체가 크게 줄어든다. 원형은 어떨까?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 원형 건물을 짓는다면, 주변 공간을 사각형 건물보다 더 많이 침범하고, 잡아 먹기 때문에 빈틈이 크게 생기게 된다. 쉽게 말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 Ⓒ Norm Architects 사각형 건물과 잘 어우러져야 하는 만큼, 가구나 소품 역시 직각을 활용한 사각형 형태로 만들어진다. 벽장과 책장, 옷장과 서랍장, 침대 모두 사각형 형태를 띈다. TV나 모니터, 냉장고, 세탁기, 스마트폰, 전자레인지 등의 전자기기 역시 사각형이다. 이 모든 물건들이 사각형이 아니라 원형이라고 생각해보자. 공간은 비효율적으로 채워질 것이고, 지금처럼 많은 물건을 보관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 Ⓒ INGA SEMPE 인간의 신체 구조 역시 이렇게 ‘효율적으로’ 짜여 있다. 과학자 로버트 훅에 따르면, 인체는 60조에서 80조의 육면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포가 모여 몸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하게 빈틈없이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둥그스름해 보이는 부분들 모두 사실은 사각형들의 효율적인 결합이었던 것이다. 사각형은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안전하기도 하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사각형보다 부드럽고 둥그런 원형이 더 안전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 모든 물체가 동그랗다고 가정해보라. 바닥도, 벽도, 천장도, 책상도 모두 동그랗다면 우리는 넘어지고 부딪히고, 또 계속해 굴러다녀야 할 것이다. : Ⓒ Lucidi Pevere 사각형이 안전하다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것이었다. 동양에서는 사각형을 땅의 상징으로 보았다. 옛 시대에는 단단하게 우리를 받쳐주는 땅만큼 안전한 것은 없었으리라. 서양에서도 사각형은 안전의 상징이었다. 내적, 외적, 입체적으로 굳건한 모양을 갖춘 사각형은 인간을 보호해주곤 했다. 사각형은 ‘구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것은 내 것을 지키려는 물질적 욕망이었으며, 동시에 선을 그어 타인과 나를 구분해 지켜내려는 보호의 상징이기도 했다. : ⓒ Ronan & Erwan Bouroullec Design 지금까지, 사각형의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알아보았다. 사각형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역시 ‘안전’과 ‘효율’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며, 동시에 위험한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사각형. 이 기사를 읽고 나서 당신 곁에 있는 사각형들을 더 유심히 관찰해보라. 사각형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더 살기 좋게 만들어주고 있을 테니까. 우리를 효율적으로, 또 안전하게 살게 하는 도형, 사각형이다.

초록

Ⓒ ferm LIVING - Unfold Room Divider, Dark Green 초록 시작과 성장, 안전과 편안함의 색 기나긴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산과 들에 온통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난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도 기지개를 켜고, 아이들은 새로운 반,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비록 지난 1월부터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피어나는 꽃과 돋아나는 초록의 이파리를 보아야 비로소 한 해의 시작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풀(草)의 푸름(錄)을 닮은 색, 초록은 이렇듯 온갖 동식물과 우리 인간에게 새로운 시작, 생명의 태동을 상징하는 컬러다. Ⓒ Tradition - Antwerpen, Pavilion AV4 초록이 상징하는 새롭고 싱그러운 이미지는 곧 미숙함, 덜 익은 것과 연관되곤 한다. 고추, 사과 등의 붉은 과채는 완전히 익기 전까지 푸릇푸릇한 초록색을 띠는데, 이때 수확한 것을 우리는 ‘풋사과’, ‘풋고추’ 등으로 부른다. 나아가 경험이 적거나 어린 티가 나는 이를 두고 우리는 ‘풋내나는 애송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표현이 단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영어에서도 풋내기(Green)나 애송이(Green behind the ears)라는 표현이 널리 쓰인다는 것을 보면, 어느 언어권에서든지 초록이라는 컬러가 에너지 넘치지만 아직 완전히 여물지 못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BD Barcelona - Jaime Hayon - Showtime Cabinet 초록은 곧 풀의 색, 나뭇잎의 색이다. 때문에 초록이 자연과 환경을 상징하게 된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결과다. 세계의 많은 기업과 정당이 환경 보존, 친환경성을 내세우며 초록색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그린 에너지(Green Energy), 그린 경영(Green Management)이나 그린 오션(Green Ocean) 같은 추상적인 표현을 보거나 듣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녹음이 우거진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린다. Ⓒ Monica Förster - Zero Umbrella Pendant lamp 일반적으로 교통 신호 체계에서의 초록은 안전, 허가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초록색 신호등은 ‘가도 좋다’는 의미로 쓰이며, 보행자들과 운전자들은 이 초록 신호에 맞추어 통행한다. 안전색채에서의 초록은 안전, 구호, 대피로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 Norm Architects - Nepal Projects 초록은 또한 파랑과 노랑의 혼합색으로, 온도감에서는 중성색에 속하므로 격렬한 느낌보다는 차분하고 균형 잡힌 색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때문에 초록색은 심신을 안정시키거나 눈의 피로를 해소하는 데에도 많이 사용되는 컬러다. 수술실에서 환자의 붉은 피를 보며 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외과 의사들의 수술복이 초록색인 것도 이와 연관이 있으며,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거나 학습을 하며 눈의 피로감을 줄여주기 위해 아이 방의 벽을 초록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 Iona Vautrin - Mascotte - Bosa 중세 기독교가 검은색으로 그들의 종교적 엄숙함, 독실한 신앙심을 나타냈다면, 이슬람교는 초록을 신성시하며 사원의 돔을 초록색으로 칠하거나 초록 의복, 초록 터번을 쓰고 다녔다. 코란에서의 초록은 창조, 낙원, 또 예언자 무함마드를 상징하는 컬러다. 중동의 주요 이슬람 국가를 보면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은 초록색을 전면으로 내세운 국기를 사용했으며, 이란과 시리아는 국기 중앙에 초록색 무늬를 쓰고 있다. ⓒ Bvlgari 이처럼 시작과 미숙함, 환경과 안전을, 일부 종교에서는 ‘신성함’의 의미까지 지니고 있는 초록은 아이러니하게도 ‘독(毒)’과 ‘죽음’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초록색이 대중적으로 독성 물질의 이미지를 얻게 된 계기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인공적으로 초록색 안료를 만들기 위해 독극물 제조에도 쓰이던 비소 성분을 주로 사용했다. 1775년 스웨덴의 화학자 셸레는 아비산구리를 주성분으로 하는 연두색 안료를 발명했다. 그의 이름을 딴 컬러 셸레 그린(Scheele’s green)은 곧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며 벽지, 직물, 의복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됐다. ⓒ La Chance 그러나 셸레 그린 컬러로 물들인 벽지, 의복의 미세한 비소 입자들은 공기 중으로 독성 물질을 발산해 많은 이들을 비소 중독으로 사망케했다. 한때는 셸레 그린 컬러가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프랑스의 지배자였던 그는 그가 가장 사랑하던 컬러인 셸레 그린의 벽지로 개인실을 도배했었고, 사후 진행된 검사를 통해 그의 머리카락에서 현대인보다 100배가량 높은 수치의 비소가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9세기 말 무렵에서야 셸레 그린 염료의 생산이 중단되었고, 초록색은 사람들에게 독성물질, 죽음을 상징하는 컬러로도 깊이 인식된다. 지금도 많은 매체에서는 독극물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초록색을 활용하고 있다. ⓒ Jonatan Pie 생명과 자연, 편안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독과 죽음의 의미 또한 가지고 있는 컬러. 초록이다

보라

: Ⓒ Norman Copenhagen 때로는 퍼플, 때로는 바이올렛. 간혹 자주색과 담자색, 때로는 라일락과 라벤더의 색, 가끔은 마젠타. 각기 다른 색을 칭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보라’다. 여느 색이 그렇듯, 보라색은 다양한 감정과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강수지는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라며 보라의 산뜻함을 얘기했다. “핫핑크보다 진한 보라색을 더 좋아해.”라고 노래한 아이유도 있다. 그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뜻을 담은 보라, Objet를 통해 보라의 의미를 살펴보라. : Ⓒ 2015 Maison Objet 타르수스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왕실의 바지선, 금장식으로 화려하게 반짝이며, 거대한 돛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를 호령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배였다. 보라는 왕족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근대 이전에는 보라색 염료를 만들어내는 비용이 무척 비쌌기 때문이다.염료인 티리언퍼플 1그램을 생산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을 살펴보자. 우선 바다달팽이 1만 2천 마리가 필요했다. 달팽이를 으깨 분비선을 노출, 분비선에서 나오는 액체를 받아 양털을 태운 재와 오줌을 섞어 열흘 동안 발효해야 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도 순수한 보라색 염료를 얻기란 무척 어려웠다. 바다달팽이의 종에 따라 분홍색이나 파란색이 나오는 경우도 흔했기 때문이다. : Ⓒ Norman Copenhagen 그렇다면 보라색은 어떻게 대중화될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1956년 왕립화학대학 화학도였던 윌리엄 헨리 퍼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런던은 석탄 가스를 사용하는 가로등을 설치하고 있었다. 석탄 타르는 가스 생산 과정의 부산물로 풍부히 공급되었고, 그는 그 가운데 탄화수소가 말라리아 치료제로 쓰일 수 있는지 연구하고 있었다. 연구는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나 석탄 아닐린과 크롬산을 섞었을 때, 그는 그 곳에서 자주색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용액은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색을 띄었다.” : : Ⓒ Norman Copenhagen 보라색이 문화에서 특정한 무언가를 상징하게 되었다고 여겨진 시기는 ‘서프러제트’ 무렵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 유럽에 불었던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운동가들은 보라색을 자신의 상징 삼아 투쟁을 시작했다. 서프러제트는 최근 캐리 멀리건, 메릴 스트립, 헬레나 본햄 카터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서프러제트의 영향일까. 현재에도 보라색은 페미니즘의 상징색 중 하나로 여겨진다. Ⓒ Kartell 1967년 ‘사랑의 여름’ 역시 보라색이 지금의 이미지를 얻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등장 이후, 샌프란시스코 헤이트-애쉬베리 교차로 부근에 결집한 사람들은 소위 ‘히피 혁명’을 일으켰다. 머리에 보랏빛 꽃을 꽂고, 보랏빛 사인을 들고, 보랏빛 옷을 입은 이들이 거리로 뛰어 나왔다. 패션 산업은 이를 제일 잘 캐치했다. 60년대 말, 보라색 의류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 Ⓒ Norman Copenhagen 보라색이 ‘저항의 상징’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보라색 빗속에서의 저항(the Purple Rain Protest)’이었다. 인종분리정책을 펼쳤던 정부는 자신들의 뜻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가려내 처벌하기 위해 보라색 염료를 집어 넣은 물대포를 분사했다. 보라색으로 물든 사람들은 재판도 없는 체포와 구금 대상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물대포의 방향을 여당의 당사 쪽으로 돌려 놓았고 보라색 비는 당사 건물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라색 국민의 힘을 인정하라.’는 요구는 그 이후 빗발처럼 거세지기 시작했다. 보라색은 이밖에도 다양한 문화권에서 많은 의미들을 드러내고 있다. ‘보라스럽다(So Purple)’는 말은 스페인 문화권에서는 와인과 음식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사람을 뜻한다. 때로는 분노(Purple Rage)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는 화난 사람의 얼굴 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역사 속 보라색의 기원과다양한 의미를 만나보았다.

Ⓒ Tai Ping, Prismatic I Rug 원 완벽, 공평의 아름다운 도형 Ⓒ Muuto, The Dots 직선과 각으로 이루어진 사각형, 삼각형 등의 도형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이라는 인상을 주곤 한다. 그러나 원은 다각형의 도형에 비해 어딘가 이지적이고 모호하며,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우리 손으로 만든 경제와 예술, 건축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원(圓)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우리가 가장 즐겨 사용해왔고, 가장 가까이에서 접해왔으며 가장 경외하는 도형이다. Ⓒ Cristina Celestino, Mattia Balsamini Ⓒ Ionna Vautrin, Cyclope Moustache 밤하늘의 보름달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또, 물 위로 퍼지는 동심원을 바라보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우리는 동그란 형체를 가진 사물, 또는 현상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나 알 수없는 안정감을 느낀다. 자연 속에는 보름달이나 동심원 외에도 무수한 원의 형태가 존재한다. 나무의 단면과 열매 맺는 과일들. 어디 그뿐이랴, 당장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조차 우주에서 보면 둥근 구(球)의 형태를 띠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원형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일지 모른다. Ⓒ Eno Studio, OLYMPIC Coat Hanger Ⓒ Eno Studio, Clothes Rack Coat Hanger 지난 수 세기 동안 인지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원형에 끌리는 이유’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를 찾고자 노력해왔다. 1921년 스웨덴의 심리학자 Helge Lundholm은 선, 도형을 그려 감정을 표현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피실험자들은 ‘딱딱하다(Hard)’, ‘거칠다(Harsh)’, ‘잔인하다(Cruel)’라는 단어를 표현할 때 모난 선과 각진 도형을 사용했고, ‘부드럽다(Gentle)’, ‘조용하다(Quiet)’, ‘온화하다(Mild)’를 표현할 때 곡선, 원을 주로 사용했다. 이후로도 수 년간 감정과 선, 도형의 유형을 연관시키고자 했던 다른 연구들은 Lundholm의 이런 발견을 뒷받침해왔다. Ⓒ Federica Biasi, Jolie Ⓒ Xavier Lust, Gun Metal Chair 활자술, 타이포그래피는 이와 유사한 분석의 대상이 되어왔다. 1968년 심리학자 Albert Kastl과 Irvin Child가 실시했던 연구는 피실험자들이 ‘긍정적인 가치’, 예를 들어 ‘활기 넘치는(Sprightly)’, ‘반짝거리는(Sparkling)’, ‘꿈을 꾸는 듯한(Dreamy)’, ‘원대한(Soaring)’ 등을 표현할 때 둥글게 굽어지고 가벼운 활자와 Sans-serif 서체를 서로 어울리는 요소로 연결 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 Eno Studio, B4 & B5 Vases Ⓒ Cristina Celestino, Orfeo 2011년에는 한 인류학 연구소에서 5개월 미만의 영아를 대상으로 아이 트래킹(Eye Tracking: 시선추적) 실험을 진행했다. 완성된 단어를 말하거나 낙서를 하기 이전 단계의 아기들에게 여러가지 도형, 선 등의 시각자료를 보여주어 어떤 유형을 선호하는지 파악해본 결과, 아기들은 각이 지고 모난 시각 자료보다 곡선, 타원, 원형 등 ‘부드러운’ 시각 자료에 더욱 집중한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우리가 원과 곡선에 이끌리는 것이 후천적인 습득을 통해서가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는 주장에 더욱 힘을 싣게 됐다. Ⓒ Muuto, The Dots 위와 같은 무수한 사례들은 명백한 사실을 반복적으로 증명할 뿐이다. 바로, 우리 중 대다수가 선호하는 것들은 각이 지고 모난 것이 아닌, 굽어진 것, 둥근 것, 원(圓)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위협과 부상을 암시하는 날카로운 각도, 뾰족한 모서리를 가진 물체를 외면하려 한다. 비록 자연의 위협이 줄어든 21세기에도 이런 본능이 이치에 맞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다치게 할 위협이 없는 듯한 형상을 선호한다. Ⓒ Eno Studio, Maison&Objet Janvier 2017 기하학에 있어서 원이 가지는 상징성은 날카로운 각과 뾰족한 모서리가 없어 부드럽고 편안하다는 점 이외에도 다양하다. 원형은 회전하는 바퀴처럼 지속적인 움직임을 나타내거나 표면 위의 구멍을 뜻하기도 한다. 원은 또한 공평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성질도 품고 있다. 아서왕과 그의 가신들은 왕을 제외한 모두가 평등한 자리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원탁에 앉았고, 이후로도 ‘원탁’은 공평한 대화, 대등한 관계를 상징하게 됐다. 한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원형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았다. 원은 시작도, 끝도, 옆면도, 모서리도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이어져, 원은 온전한 것, 완벽을 상징하며 우리 주변의 많은 곳에서 쓰이고 있다. Ⓒ Eno Studio, Favourite Things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완벽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떤 원형의 사물이 함께했는가? 눈을 뜨고 처음 들여다본 시계에도, 당신의 아침을 깨워준 커피잔에도, 퇴근길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밤하늘의 달에도 완벽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덕분에 당신의 하루도 조금 더 완벽하고 아름다웠을지 모른다. Ⓒ Eno Studio, SOCOA 완벽, 공평의 아름다운 도형, 원이다.

화이트

Ⓒ Analogia Project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입니까."배달의 민족이라고 대답하고 싶다면 땡, 이번만은 틀렸다. 치킨, 피자, 꿔바로우, 마라탕. 배달해 먹고 싶은 음식은 많겠지만 이번만은 우리 민족에 붙는 다른 수식어를 떠올려보자. 바로 ‘백의민족(白衣民族)’말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 불렸다. 이는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한, 오랜 전통에서 유래한 별칭이었다. 19세기 한국을 방문한 서구인들은 이 ‘흰옷’에서 특별함을 발견했다. “옷감 빛깔은 남자나 여자나 다 희다. (조선기행, Oppert, E.J)” 혹은 “천천히 그리고 육중하게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고 있다. (Laguerie, V.de)” Ⓒ studio Sebastian Herkner 백의를 금지하고자 하는 역사적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다. 음양오행설과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13세기 후반 고려 충렬왕부터, 태조 7년, 태종 원년, 세종 7년, 연산군 11년과 12년, 인조 26년, 현종 11, 12, 17년, 숙종 2년, 17년까지. 그러나 이 ‘백의금지령’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일제 치하 아래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관료들은 백의를 비하하고, 유색 옷을 입을 것을 강요했지만 ‘백의’는 오히려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이런 백의 사랑은 바로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흰색이 하늘, 또 태양의 색과 유사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늘을 숭배하는 의미에서 흰색을 고집하기 시작했다는 것. Ⓒ Northern 태양의 색은 눈부시게 희다. 태양은 모든 파장의 빛을 전부 내보내기 때문이다. 하늘의 색은 곧 태양의 색과 맞닿아 있고, 이 하늘빛은 우리 일상의 배경이 된다. 그렇다. 흰색은 배경이다. 하얗던 스케치북, 미술관의 희고 긴 벽, 윈도우 그림판의 넓은 화이트 큐브,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워드 프로세스의 하얀 화면까지. 흰색은 모든 것의 배경인 동시에 모든 색을 자연스레 아울러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화이트는 이미 엉망이 된 그림을 이전으로 되돌리는 수정액이 되기도 한다. ⓒ Studio Job 그렇기 때문일까. 많은 문화권에서 하얀색은 순결과 청결, 순수함의 상징이 되곤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백설공주(Snow White)가 대표적이다. 그는 동화와 연극, 영화에서 눈처럼 하얀 마음을 가진 이로 묘사된다. 계모의 괴롭힘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일곱난쟁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는 순수하게도 타인을 잘 믿었고 그래서 곧 죽을 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 Bertjan Pot 웨딩드레스가 흰색이 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중세 이전 유럽에서는 ‘그저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선택하면 됐다. 어떤 색이든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1559년 무렵, 프랑스의 왕이었던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하며 흰색 드레스를 입었지만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하자 모든 비난은 메리 여왕을 향했다. 결혼식에 하필 상복의 색을 입었기 때문에 그가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 NANJING LINEAR ARHITECTURE 흰 드레스를 기피하는 기류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였다. 손수 짠 레이스를 단 화이트 드레스, 주황색 꽃을 꽂은 젊은 여왕은 대담하고 놀라웠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귀족들이 그 우아함을 따르려 애썼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흰 웨딩드레스가 지금처럼 당연해진 것은 1920년에 이르러서였다. 위에서 언급했듯 웨딩드레스와 ‘순결’한 흰색의 결합은 꽤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편 흰색은 검은색과 대립쌍을 이룬다. 검은 밤을 지나 처음 맞게 되는 색. 절망의 어두움을 넘어 희망과 평화의 상징이 되는 흰색이다. 검은색은 죽음과 공포를 의미했고, 때문에 이를 다뤄야 했던 사제, 또 성직자들은 검은 의복을 입곤 했다. 반대로 삶에 대한 희망 그 자체를 상징해야 했던 의사들은 그와 반대되는 흰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어떤 색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흰색’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을 만나면 종종 그들은 주인공이 되어 앞으로 나서기보다 뒤에서 다른 이들을 보조하며 그들을 조화시키는 성격이리라 짐작하곤 한다.물론 이 짐작은 대개 틀린다. 그러나 하양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자연스레 녹아들어 다른 컬러를 돋보이게 하는 색, 동시에 순수와 순결의 색, 화이트다.

블랙

Ⓒ Norm Architects - Cutlery in Black 블랙 두려움을 극복한 매혹의 색 해가 지고 나면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몰려온다. 빛의 부재로 인해 만물은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고유의 파장을 잃고 검게 물든다. 문명 초기일수록 밤은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밤이면 주변이 어두워져서 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 낮보다 기온이 떨어지는 데다가 하루 중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가장 쉬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밤이 우리에게 선사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밤과 가장 닮은 색인 검정에도 고유한 성격을 부여했다. 바로, 죽음, 공포, 불행, 악(惡)이다. Ⓒ Norm Architects - The Silo 검정에 대한 이런 연상은 대륙과 문화권을 아울러 거의 대부분이 공유하는 인식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검정은 어둠의 마술, 악신을 상징했다. 약 천 년 전의 일본에서는 검은 옷이 불운을 상징했고, 유럽 전역을 공포로 사로잡은 열성 전염병은 Black Death, 흑사병(黑死病)이라 불렸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슬픔을 표할 때도 우리는 검은 의복을 입는다. 죽음은 곧 영원한 잠, 또는 어둠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 Norm Architects - The Silo 죽음의 색, 검정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 동안 종교계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한 사회의 규범,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결정할 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에서 말하는 우리는 엄숙하고 경건히 신을 두려워해야 했고, 이와 가장 어울리는 색은 검정이었다. 중세 시대의 사제들은 검은 의복을 입었는데, 이것은 겸허, 속죄, 그리고 세속적인 삶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 Norm Architects - Shaker Trays Ⓒ Form us with Love - Mitab-Button 말 그대로 ‘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말하는 ‘흑인(Black people)’의 피부는 실제로 검은색이 아니다. 단지 다른 인종에 비해 좀 더 짙은 갈색을 가졌을 뿐. 다른 많은 것들처럼 이 표현도 노예무역이 횡행하던 시절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노예 소유주들은 그들의 재산을 두고 검다는 뜻의 라틴어 niger에서 유래한 ‘Nigro’라 불렀다. 1865년 미국에서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흑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종차별은 만연하다. 오늘날 Nigro는 흑인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현재는 Black, 미국에서는 African American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 Norm Architects - Table for Everyone 근현대 사회에서 블랙은 패션계를 주도한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컬러가 됐다. 모던한 스타일의 여성 의복을 창시한 가브리엘 코코 샤넬은 “검정의 아름다움은 절대적이며 완벽하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1960년대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에서 입고 나온 LBD(Little Black Dress)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이를 두고 “검정은 때에 상관 없이 언제든 입을 수 있고,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입을수 있다. ‘리틀 블랙 드레스’는 모든 여성의 옷장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 Normann Copenhagen - Jet 검정을 색(色, Color)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오래도록 이어져 왔다. 이는 검정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에 의해 구분된다. 검정은 빛을 흡수한다. 이 말은, 검은 물체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우리의 눈으로 반사되어 돌아오는 색이 없다는 의미다. 빛이 색을 만들어낸다고 보면, 검정은 빛의 부재일 뿐 색깔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검정을 색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검정 역시 색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는 이렇다. 검정이 빛을 흡수하지만, 빨강, 노랑, 파랑, 색의 삼원색을 섞으면 검정이 되므로 여러 개의 색깔을 섞은 검정 역시 하나의 색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검은색의 마법사라 불리던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검은색은 색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팔레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색은 검정이었다. Ⓒ Norm Architects NAERVAER Ⓒ Lucidi Pevere - Aplomb XL - Foscarini 불길하고 두렵지만 누군가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하는 자애로운 컬러, 검정이다.

옐로우

Ⓒ HAY 빨강, 초록, 파랑과 함께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컬러. 스마트폰 메신저 속에서, 포스트잇 속에서, 달력에서, 혹은 형광펜으로, 꽃과 단풍으로 만나게 되는 색이 있다. 바로 노랑이다. 이 옐로우 컬러는 우리 곁에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채 때로는 땅이 되어서, 때로는 죽음이 되어서 수많은 예술 작품 속에 숨어 있었다. : Ⓒ Ricardo Gomez Angel 과거부터 서구 문명에서 노랑색은 결코 좋은 색이 아니었다. 스페인에서 노랑은 사형집행인들이 입는 옷의 색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죽은 자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입어야 했던 옷의 색이었다. 이는 시체에서 피가 빠져나가면 피부가 누렇게 변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황달 등의 병으로 누렇게 뜬 얼굴은 생기 없는, 나약한 겁쟁이들의 상징이었다. 페르시아어에서 ‘노란 얼굴’은 나약함과 두려움을 뜻하는 말 그 자체였다. 검은색과 함께 쓰여 ‘경고’의 의미를 드러내는 건, 어쩌면 이 노랑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 Ⓒ BD Barcelona 반유대주의자들은 노란색을 유대인 그리고 이교도의 상징처럼 만들고자 했다. 프랑스의 루이 9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교황 바오로 4세에 이어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까지. 이들은 유대인을 다른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노란색으로 스스로의 출신과 신분을 나타낼 것을 명령했다. 나치는 유대인들에게 ‘Jew’라는 글씨를 박아 넣은 노란 ‘다윗의 별’을 달도록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엾게 보았지만, 노란별을 단 우리를 그들은 도와주고 싶어도 돕지 못했다. (안네 프랭크, [안네의 일기])” 그 잔인한 구분의 결과는 추방 혹은 홀로코스트였다. : Ⓒ Arquitetura Nacional 이 색상이 여성에게 가 닿으면 그 의미는 더욱 추락했다. 노란색은 질투를 의미했고, 혹은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성매매 여성들이 스스로를 어필하기 위해 노란색 의상을 입었고, 샤프란으로 머리를 염색하기도 했다. 샤프란이 음탕한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는 이런 노란색을 통해 스스로를 다른 여성들과 ‘구분’하도록 강요 받았다. : Ⓒ SONG JIUZHI 반대로 동양에서 ‘노랑’은 대지와 풍요의 상징이었다. 노랑(黃)은 곧 땅을 의미했고, 땅에서 나는 온갖 작물들과 연결되었다. 중국에서 노랑을 황 제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중국의 황하(黃河) 문명은 비옥하고 부드러운 황토를 바탕으로 시작된 농경생활에서 점차 발전해 훗날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 Ⓒ Charles 현대로 오며 이 옐로우 컬러는 정치, 사회 운동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미국 여성 참정권운동가들이 켄자스에서 노랑을 집회 및 시위에서 적극 사용한 이후, 다양한 여성 운동의 현장에서 아이덴티티 컬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 때에는 ‘노란 리본 A Yellow Ribbon’이라는 노래를 작곡해 부르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 즈음에는 노란 리본은 전쟁에 나간 병사들을 환영하고, 기다리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 Ⓒ YØDezeen 1983년에는 필리핀의 망명 정치가 베니그노 아키노 2세의 지지자들이 나무에 노란 리본을 묶어 그를 환영하기 위해 사용했고, 1986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노란 리본을 묶는 운동을 벌였다. 2014년 홍콩에서 이른바 우산혁명이 벌어지고 있을 때도,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릴 때에도 이 노란 리본은 거대한 정치적 상징이었다. : Ⓒ HAY 노란색은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만나볼 수 있는 컬러다.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인 비틀즈(the Beatles)의 Yellow Submarine같은 곡에서처럼 말이다. ‘어린이를 위한 동요’로 만든 곡이다. 콜드플레이(Coldplay)의 Yellow 같은 곡도 있다. ‘Look at the stars, Look how they shine for us, And everything you do, yeah they were all Yellow.’ 이 곡에서 Yellow가 사용된 이유는 단지 친숙하고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이 곡을 쓸 당시에 전화번호부(Yellow Book)가 앞에 있었다. 전화번호부가 Yellow Book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책에 노란 갱지가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찌라시와 가십을 유포하는 곳들에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 역시 그런 가십지들 대부분이 노란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주변 곳곳에 숨어 있는 옐로우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았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긍정적이고 친숙한 이미지로 바뀌어 간 노란색의 역사. 오늘부터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노란색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노랑의 의미와 역사를 알고 본다면 조금 더 새롭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의미와 역사를 알고나면 더욱 새롭게 보이는 컬러, 옐로우다.

체크

ⓒ Marcel Wanders - Baccarat 체크 Checkered, Checkerboard 인간이 처음으로 토기를 굽고 표면에 빗살 무늬를 새긴 이래, 우리는 여러 가지 무늬로 주변의 사물, 공간을 장식해왔다. 기하학적이거나 자연의 현상을 닮은 수많은 무늬들 중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무늬로 ‘체크무늬’를 꼽는다. 체크무늬는 서로 다른 색의 사각형, 선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규칙적인 패턴을 이루는 무늬로, 소재와 넓이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 어디에서든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체크(Checkered, Checkerboard)’라는 이름은 서양식 장기놀이의 일종인 체스에서 유래했다. ⓒ Doshi Levien 체크무늬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영역은 패션 산업이다. 누구라도 옷장 속에 체크무늬 셔츠, 체크 스카프, 체크 넥타이 등 적어도 한 가지 아이템은 가지고 있다. 패션의 세계에서는 타탄(Tartan), 플레이드(Plaid), 깅엄(Gingham), 아가일(Argyle) 등 사각형의 크기나 색상, 선의 두께 등으로 구분되는 무수히 많은 체크 패턴이 있다. 이외에도 약간의 변주를 준 다양한 패턴의 체크무늬가 매년 개발되고 있으며, 일부 유명 패션 브랜드는 그들만의 고유한 체크 패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체크를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체크무늬는 대중적이고 익숙하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체크무늬 옷을 입기 시작했을까? 1978년, 타클라마칸의 유적을 연구하던 고고학자들은 한 고분에서 미라를 발견했다. Cherchen man이라 불리는 이 미라는 타탄체크의 레깅스와 트윌 튜닉을 입고 있었고, 갈색 머리에 키가 컸으며 코가 긴 코카시안으로 추정됐다. 타탄체크의 역사와 보존을 위한 단체, Scottish Tartan Authority의 Brian Wilton은 Cherchen man의 복식으로 보아 그가 3,000년 전 스코틀랜드인의 조상일 것으로 판단했고, 추후 DNA 테스트 결과는 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미라가 입고 있던 타탄체크 레깅스는 비록 인류 최초의 체크무늬 의복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체크무늬 의복 중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그리고 이 발견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이미 3,000년 전부터 체크무늬를 패션 디자인에 활용했다는 증거가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오래전 부터 씨족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통적인 체크무늬를 보유하고 있었고, 각 씨족의 문장 대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 Amit Geron, Pitsou Kedem Architects - In praise of shadows 체크무늬의 장식적 효과는 여러 공간과 사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흑백의 체크 패턴 타일은 고전적인 바닥 장식으로, 클래식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벽, 천장보다 바닥에 힘을 실은 공간을 완성하기도 한다. 15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흑백 체크의 바닥은 주기적으로 시즌과 오프시즌을 반복하다가 최근에도 다시 등장해 상업 공간이나 가정집의 주방을 장식하고 있다. 동일한 규격의 벽돌이나 유리, 자기를 이용해 공간을 장식하는 방식은 손쉬우면서도 여러 곳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체크무늬는 바닥 이외에도 건축물의 외벽, 담벼락, 실내 공간의 벽체까지 공간 곳곳에 사용된다. ⓒ Antonio-Alcantara ⓒ Ace Avenue - ARFLEX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벽을 바라보며 문득 두려운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공백의 공포’를 벗어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러 무늬들 중에서도 체크무늬를 특히 더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상하, 좌우의 비율이 완벽한 체크무늬는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 공포감을 없앨 뿐만 아니라 피장식물(被裝飾物)에 안정감과 잘 정돈된 이미지까지 부여하기 때문이다. ⓒ Hastens 체크무늬를 뜻하는 영어 단어 Checkered는 ‘가지각색의’, ‘변화가 많은’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두 사전적 의미는 체크 패턴의 가시적인 특징으로 인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상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체크무늬는 이중성(Duality)을 의미하기도 한다. 흑색과 백색 등 서로 다른 컬러가 대조되는 것이 체크 패턴의 골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중적’이게도, 체크무늬의 이런 특징으로 인해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이 한데 모여 이루어내는 ‘조화’를 뜻할 때도 널리 사용한다. ⓒ Normann Copenhagen - Brick 미국의 시인 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우리의 삶을 체크무늬에 비유했다. 밝은색, 어두운색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체크무늬가 희비가 교차하는 인생과 닮았다 여긴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닮았기에 우리가 더욱 사랑하는 무늬, 체크다.

블루

: Ⓒ Daniel Von Appen 파랑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컬러다. 같은 파랑을 보고 누군가는 시원함을, 누군가는 차가움을 읽어낸다. 누군가는 어렸을 때 보았던 맑은 바다의 색을 떠올린다. 어떤 이는 외로운 파랑새를 발견하고, 또 다른 이는 이 색을 통해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고자 한다.각자의 이야기와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색깔이기 때문일까. 많은 연구에 따르면 블루는 보편적으로 인기있는 컬러다. 심지어 ‘빨강’과 ‘황금’으로 상징되는 중국에서도 파랑은 가장 인기 있는 컬러로 꼽힌다. (중국 인민 대학 부설 여론조사연구소 조사, 1996.) 많은 이들은 파란색을 선호하는 이유를 자연과 닮은 빛깔에서 찾는다. 푸르디 푸른, 맑은 날의 하늘 색, 투명하게 맑은 바다의 색이며 우주 저편에서 바라본 지구의 색. 자연에서 우리가 두려움과 경외심, 안정감을 느끼듯 블루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색에서 차가움을 보지만, 동시에 이상(理想)을 만난다. : Ⓒ Norman Copenhagen 역사 속에서 블루는 어떤 의미였을까. 고대 로마 시대, 파란색은 야만의 상징이었다. 로마에게 파란색으로 치장하고 과시하는 북방 민족은 공포로 다가왔다. 심지어 로마에는 이 푸른색을 일컫는 단어조차 없었다. 그저 전장 위에 썩어가는 시체에 남은 시퍼럼이었을 뿐. 그러나 10세기 이후, 이 푸르름은 성모의 옷을 칠하는데 쓰이며 성스러운 색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청교도의 시대로 넘어 와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새파랗게 상징하기 시작했다. 이는 후대의 언어습관에도 남아 청교도 법을 의미하던 Blue-Law는 엄격함을 상징하게 되었다. : Ⓒ Coco Capitan 근대로 넘어오면, ‘파랑’은 훨씬 더 다양한 상징으로 기능하게 된다. 블루칼라(Blue Collar)는 생산직, 서비스직 노동자를 일컫는 명칭으로, 그들의 푸른색 작업복으로부터 비롯됐다. 청바지가 본래 노동자의 작업복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래서일까. 파랑색은 곧 전문가의 색, 신뢰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첫 미팅 자리에서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으면 푸른 계열의 셔츠를 입어라.’ 같은 조언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삼성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HP와 IBM 등 기업이 아이덴티티 컬러로 파란색을 택하는 경우 역시 이와 연관되어 있다. : Ⓒ Marcel Wanders 블루칼라가 비사무 노동자를 의미하지만, 역설적으로 정치에 있어서는 그와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우파(右派)를 뜻한다. 17세기 영국에서 군국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창당한 토리당(TORY)이 블루 컬러를 전략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붉은색의 공산주의 진영과 대립하는 푸른색의 이미지는 냉전시대를 거치며 더욱 확고해졌다. 마가렛 대처 또한 이런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파란색을 상징처럼 점유했다. : Ⓒ Norman Copenhagen 대중문화 속 파란색은 어떨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파란색이 가진 우울함이다. 이는 블루스(Blues)라는 이름의 장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흑인들이 받던 핍박과 차별을 드러냈던 음악은 이후 록, 메탈, 재즈, 힙합 등, 현대 대중음악의 시초가 되었다. 블루스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장르는 아마 리듬앤블루스(rhythm and blues)일 것이다. 흔히 R&B로 불리는 이 장르는 국내외 대중음악 팬들에게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장르다. : Ⓒ Abdellatif Kechiche, Blue is the Warmest Color, 판씨네마 제공 파랑을 그저 우울함으로 보지 않으려는 시도 또한 있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Blue is The Warmest Color)]가 그렇다. 파랑은 이 영화에서 정말, 가장 따뜻한 색으로 그려진다. 고등학생 아델이 파란 머리를 가진 엠마를 만나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단지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이들이 만나고, 지치고, 헤어지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들을 구질구질하지만 밀도 높게 보여준다. 파란색은 이들의 머리로, 또 옷으로 마음을 나타내는 미장센(Mise-en-Scène)이 된다. 이 영화는 파랑을 사랑의 색으로 그려냈다. : Ⓒ Scott Webb 지금까지 역사와 문화 속에서 파란색이 어떤 컬러로 인식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블루는 때로는 우울이었고, 때로는 안정이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불안하게 하는 색이었고, 누군가에게 편안함을 주는 색이었다. 블루는 때로는 충성심(true-blue)을 의미했고, 가끔은 엄격함(blue law)을 의미했다. 종종 에이스(blue-chip)를 의미했고, 어떤 때에는 새로운 시장(blue ocean)을 뜻했다. 파란색은, 그저 파란색이 아니다. 파랑 그 자체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빨강

Ⓒ Normann Copenhagen - Form Table Cafe 빨강 피, 불, 사랑과 분노의 색 빨강은 우리가 색(色)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컬러다. 빨강은 인간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빛, 가시광선 중 가장 파장이 길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이 가장 잘 반응하고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눈에 잘 뜨인다는 특징과 더불어, 자연 속의 빨간 물질들은 피나 불처럼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 식욕, 사랑, 섹스, 뜨거움, 정열, 분노, 광기, 공포, 그리고 경고와 금지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회 속의 강렬한 여러 관념, 현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빨간색을 칠해왔다. 인간은 약 10만년 전부터 골수에서 추출한 지방과 붉은 황토(산화철)를 빻고 섞은 빨간색 합성 물감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장식에 활용했다. 그리고 빨강은 우리의 몸에 피가 흐르고 하늘 위 태양이 타오르는 한 앞으로도 강렬한 상징성을 품은 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다. Ⓒ Normann Copenhagen - Geo Series ‘빨강’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물건이 있는가? 어떤 이는 사과를, 어떤 이는 빨간 하트를 연상하거나 소방차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빨강이 인간 사회에서 품는 상징성은 크게 보면 두 가지 빨간 물질, 현상을 뿌리로 두고 있다. 바로 우리의 몸을 흐르는 피와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다. Ⓒ Normann Copenhagen - Dustpan & Broom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血)가 단순히 우리의 몸을 이루는 체액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본질, 또는 생명 그 자체로 여겨지기도 했다. 때문에 피의 색인 빨강은 오늘날까지도 ‘생명의 색’으로 간주된다. 빨강을 생명의 색으로 보는 견해는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거나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모든 생명의 원초적인 욕구 - 식욕과 성욕(혹은 사랑의 감정)을 자극하는 컬러로도 쓰인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패스트 푸드점의 빨간 로고, 혹은 빨간 인테리어 디자인은 고객의 식욕을 자극하고자 하는 컬러 활용의 기술이며, 붉은 입술, 그리고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빨간 립스틱’은 여러 예술 작품, 미디어에서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심벌로 활용되곤 한다. Ⓒ OFFICIAL - Robert Yu - Civitas Capital Group 우리는 사회적인 통념상 빨강 계통은 뜨거운 색, 파랑 계통은 차가운 색으로 바라보며 여러 색채에 온도감을 부여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 시스템에서 온수는 빨간색으로, 냉수는 파란색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보면, ‘빨강은 뜨거운 색’이라는 인식이 인간 사회에서 얼마나 광범위한 지배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모든 대륙을 통틀어 불(火)에서부터 기인했다. 한편, 이 ‘빨강은 뜨거운 색’이라는 견해와 빨간색이 가진 자극적인 특징이 맞닿아 우리는 정열, 흥분, 분노, 광기를 표현할 때에도 빨간색을 활용한다. Ⓒ Fabien Verschaere, Red Fish, 2019, acrylic on paper, 42x29.7 cm 현대 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족, 권력자들만 빨간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우선 섬유를 염색하는 빨강 염료가 무척 비쌌으며, 제조 과정 또한 복잡했고, 그 외에도 지배층이 사회의 위계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계층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의 색에 제한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빨강은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혁명, 노동자들의 단결, 나아가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색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한때 빨강이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적도 있다. ⒸSong Ji Yoon, reddish background_oil on canvas 150x174cm 2015, Lee U Gean Gallery Ⓒ Congy Yuan 한편, 안전색채(安全色彩, safety color)로써의 빨강은 그 우수한 시인성으로 인해 금지, 경고, 위험을 의미하는 신호에도 많이 쓰인다. 초록, 노랑, 빨강 중에 가장 눈에 잘 띄는 신호등의 빨간 신호는 차량, 보행자 모두에게 ‘정지’를 의미하며 보는 이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빨간색의 ‘출입 금지’, ‘미성년자 관람 불가’ 표지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경고, 금지를 의미한다. 같은 이유로 소방과 관련된 구조물, 설비 역시 빨간색이 근본이 된다.사람들이 어떤 개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은 언어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말에는 새빨갛다, 불그죽죽하다, 벌겋다 등 빨강을 표현하는 수십 가지 형용사가 있다. 또,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터무니없는 거짓을 일컬어 ‘새빨간 거짓말’이라 한다. ‘혈기왕성하다’는 표현은 영어로 ‘red-blooded’다. Ⓒ BD Barcelona - Dalilips 홍등가(紅燈街), Moulin Rouge(물랭 루주: 빨간 풍차를 장식한 파리의 댄스홀, 극장) 등 빨간색으로 성적인 암시를 은유하는 단어들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빨강은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컬러다. 그 존재감으로 인해 우리의 언어 속에도 빨강은 깊숙이 자리했다. 많은 학자들은 빛과 어둠, 즉 흑과 백 이후에 가장 먼저 이름 지어진 색채를 빨강으로 보고있다. Ⓒ Daria Nepriakhina 사랑과 분노, 권력과 저항, 위험하고 매력적인 아이러니의 컬러, 빨강이다.

키친웨어

“식사하셨어요?”부터 “밥은 먹고 다니냐,” 또 “밥 한 번 먹자.”는 말까지. 한국어 화자에게 ‘밥’은 상대의 안녕을 묻고 기약하는 하나의 인사가 된다. 밥과 음식을 우리는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야 흔하다. 동네 허름한 백반 집부터 그럴 듯한 인테리어의 레스토랑,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는 패스트 푸드점까지. 요즘은 멀리 나가지 않고도 다 배달이 된다. 그러나 일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밥’과 쉽게 만나게 해주는 곳은 바로 주방일 것이다. 주방만 있다고 밥이 만들어지나, 아니다. 불이 있어야 하고, 음식을 만들고 먹을 수 있게 돕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바로 키친웨어(Kitchenware) 말이다. 키친웨어는 좁게 보면 나이프, 포크, 스푼, 팬과 냄비 등을 뜻하지만, 넓게 보면 주방에서 쓰이는 조리도구와 식사 도구의 총칭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키친웨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오브제의 시작은 최초의 요리에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 2004년에는 약 79만년 전의 아슐기 유적에서 인류가 불을 사용해 요리를 한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이때 사용된 화덕, 혹은 막 조리되어 뜨거운 요리를 꺼내기 위해 사용된 도구들이 바로 일종의 ‘키친웨어’였을 것이다. 요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키친웨어의 역사이다 보니, 키친웨어의 역사는 자연스레 주방의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고대에는 땅에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붙였고, 그곳이 바로 주방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불 위에 금속 가마솥을 매달아 조리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요리에 필연적이었던 문제인 그을음과 연기는 16세기에 굴뚝이 생겨나며 해결되었다. 주방의 디자인, 또 조리도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스토브(Stove)’의 발명이었다. 1735년 프랑스 디자이너 Francois Cuvilliés의 발명은 요리에 투여되는 노동과 드는 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여주었다 스토브의 도입으로 인해 프라이팬과 냄비는 현대적인 모습, 즉 평평한 바닥과 손잡이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주철, 구리 등이 당시 프라이팬을 만드는 주재료였으며, 현대로 와서 이는 대부분 알루미늄, 스테인리스강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포크와 나이프, 스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나이프와 스푼의 등장은 음식을 먹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포크는 꽤 이질적인 면이 있다. 실제로 포크는 이 세 가지 커틀러리(Cutlery) 중 가장 나중에 등장한 것이다. 15세기 중엽까지는 포크로 찍을 음식 자체가 없었다. 농노들이 먹을 것이라고는 묽은 죽과 빵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소수의 이탈리아 귀족들이 비싼 옷을 더럽히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포크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이 주신 음식을 손 이외의 도구로 먹는 것은 불경’이라는 종교적 이유가 더해져, 이것이 테이블 위에 일상적으로 놓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주방도구의 발전, 식사도구의 발전은 곧 요리의 발전이었다. 키친웨어가 없더라도, 일정 수준의 ‘요리’는 분명 가능했을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든 허기를 채우며 살아 왔으리라. 그러나 요리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이제 인간의 혀를 매혹하고, 또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키친웨어의 눈부신 발전 덕에 가능했다. 믹서기와 에어프라이어, 전자레인지와 식기세척기까지. 칼럼니스트 Bee Wilson은 그의 저서 [Consider the Fork]에서 궁극적으로 포크의 발전 덕에 요리의 발달이 가능했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우리가 한 시점에 소유한 도구들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반드시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고 삶을 더 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명이 있는만큼 암도 있다. 많은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주방도구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이후의 여성들이 요리를 포함해 가사에 드는 시간이 늘 일정하다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요즘의 예를 들자면, 에어프라이어의 등장은 예전 같으면 밖에서 사먹었을 튀김류의 음식을 집에서도 만들게 했다. 이는 결국 에어프라이어를 위해 재료를 사고, 음식을 만들고, 이를 정리하는 시간이 들기 때문에 도구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요리에 드는 시간이 줄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어쩌면 키친웨어의 역사는 이렇게, 요리의 역사에 비해 대단하지는 않아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의의 는 있다. 키친웨어가 없는 삶이란 정말 원시의 그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므로. 팬이나 냄비가 없다면 사람들은 동물을 불 구덩이에 구워 맨 손으로 뜯어 먹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키친웨어는 우리에게 좀 더 위생적인 식사와 다양한 요리를 선물해 주었다. 오늘 먹는 저녁에는 당신 앞에 놓인 도구들이 무엇인지, 얼마나 소중한지 느껴보자. 우리에게 매끼의 식사를 선물해주는 오브제, 키친웨어다.

바닥

ⓒEURO Ceramic - Yaki 바닥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우리를 받쳐주는 흔히 ‘바닥’은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주가가 바닥을 쳤다’던가, ‘잔고가 바닥났다’던가. 우리는 주로 ‘아래’, ‘최저’의 의미로 바닥을 사용하지만, 우리 발밑의 바닥이 없다면 서거나 앉고 걸을 수조차 없다. 우리는 종종 바닥을 무시하고 그 존재를 미처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바닥은 물리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공간 안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을 딛으면서부터 화장실, 주방, 집 밖을 나서 대중교통, 회사, 식당 등 하루 종일 수많은 공간에 들어서며 그곳의 바닥을 밟는다. 바닥은 감히 천장처럼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거나 벽처럼 당돌하게 마주 서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 그리고 바닥은 우리의 조상이 단단한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서면서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묵묵하고 겸손히 주어진 자리에서 맡은 바를 다해왔다. Ⓒ EURO Ceramic - Terrazzo Bucchero 초기 단계의 집은 바닥보다는 천장이나 벽체에 주목했다. 당시에는 집을 지음으로써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인 추위와 포식자, 비와 눈을 막는 것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닥은 흙, 짚, 건초 등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우리가 바닥으로 눈을 ‘내린’ 것은 천장과 벽이 어느 정도의 발전을 이루고 나서부터다. 외부의 환경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바닥재는 질병이나 습기에 취약했고, 집을 지을 때 바닥 역시 벽체나 천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 OOIIO Arquitectos - Casa GAS 약 5,000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석조 건축물을 지으면서 석재 타일에 색을 입혀 ‘모자이크’ 패턴을 최초로 사용했다. 이는 실내 공간에 별도의 작업을 통해 가공한 장식용 바닥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 FAIRMONT QUASAR ISTANBUL 한편, 로마제국(기원전 27세기 - AD 476년)의 건축가들은 건축물의 석재 바닥 아래에 작은 공동(空洞)을 만들어 그 아래에서 불을 지피는 방식, ‘히포카우스툼(hypocaust, 하이포코스트)’을 고안했다. 이는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방식 ‘온돌’과 비슷한 형태다. 세라믹 타일은 한때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수 세기 동안 제작법이 유실되었으나, 1800년대 중반 유럽에서 다시금 부활해 오늘날까지도 화장실, 주방의 바닥에 사용되고 있다. Ⓒ Estudio A0 - Casa Ortega 목재 바닥재는 중세시대 목조 건축물을 지으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최초에는 바닥에 널빤지를 가로질러 대는 단순한 형태였지만, 곧 돌이나 금속으로 거친 표면을 부드럽게 다듬은 목재를 바닥재로 사용하게 됐다. 그 후 미려한 장식적 요소가 가미된 것은 바로크 시대(1621-1714), 예술적인 프랑스 세공과 상감 세공 패턴이 부유층 사이에서 유행하면서부터다. 당시의 장인들은 나무 조각을 손으로 깎고 끼워 맞추면서 각각의 패턴이 입체적인 대조를 이루도록 했으며, 염료를 통해 미려한 색의 차이를 뽐내기도 했다. Ⓒ PARADISE SEGASAMMY Co. Ltd 시베리아 지역에서 발견된 Pazyryk carpet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물 러그라고 알려져 있다. 카펫 역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동과 아시아 지역 등 세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페르시아 Safavid 왕조(1502-1736) 시기에는 카펫 짜는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한 시기였다. 당시의 패턴들은 오늘날에도 애용되고 있으며, 여전히 고가의 장식품으로 거래된다. Ⓒ EURO Ceramic - Yaki 우리는 모두 바닥을 밟고 있다. 그리고 지구상에 중력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바닥을 밟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바닥은 어떤 소재인가? 원목? 타일? 혹은 대리석이나 카펫? 현대 사회에서 집 안의 바닥재에는 수많은 옵션이 있고, 덕분에 우리가 하루 종일 드나드는 모든 공간은 각각 다른 질감과 색의 바닥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우리는 지난 5,000년간 집 안에 다양한 종류의 바닥재를 사용하면서 쾌적하고 아름다운 실내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 Fala Atelier - House in Rua Faria Guimarães 다양한 모습으로 발 아래에서 우리를 받쳐주는 오브제. 바닥이다.

창문

: Ⓒ Pawel Czerwinsk 집을 구할 때 중요히 봐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이를테면 방음은 잘 되는지, 물은 잘 나오는지, 교통 조건은 좋은지, 주변에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자면 역시 볕이 얼마나 잘 드는 지일 것이다. 채광이 좋을수록 공간은 쾌적해진다. 충분한 채광에 필요한 것은 적당한 크기의 창(Window)이다. 적당한 크기의 창은 실내 곰팡이나 세균의 번식을 막아줄 뿐 아니라, 통풍과 환기를 통해 실내 환경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 Ⓒ FADD Architects 보안 등의 특수한 이유가 아닌 한, 창이 없는 공간은 없다. 침례교의 목사였던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은 이렇게 얘기했다. “창문 없는 건물은 집이라기보다 감옥이다. 아주 어두워서 아무도 살지 않는다.” 심지어 감옥에도 창문이 있다. “바깥에서는 70년대의 대망에 모두들 가슴이 부풀고 희망찬 설계가 한창인 모양이지만 감옥에 갇혀 앉아 있는 내게는 고속도로도, 백화점도, 휴일도, 연말도, 보너스도, 친구도 없이 쇠창살이 질러 있는 창문 하나만 저만치 벽을 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 Ⓒ Nitaprow 인류 최초의 집이었던 동굴에는 물론 창문이 없었다. 동굴은 거대한 자연으로부터 약하디 약한 인류를 보호하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좁고 작은 입구는 맹수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가져다 주었다. 동굴 이후에는 나무로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굴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무 집 위에서 모닥불을 태울 수는 없었다. 이 집에 네모난 틀(Frame)은 없었지만 마냥 어둡지는 않았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 사이로 빛이 조금씩 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 Ⓒ PARALELO ZERO Architecture 건축물이 구조를 갖추기 시작하면서는 창문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창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벽을 뚫어야 했고, 벽을 뚫는 과정은 지지기반이 약해진 위쪽 벽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창문 위에 길고 두꺼운 돌 혹은 목재로 만든 인방보를 넣어 이를 방지했다. 하지만 인방보가 길어질수록 지탱해야 할 무게도 늘어남으로 부러질 염려가 있었다. 창문의 폭은 자연스럽게 인방보의 길이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폭이 넓은 창문을 만드는 방법은 더 비싼 석재를 사용해 더 튼튼한 인방보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가능한 건, 돈이 많은 귀족들 뿐이었다. : Ⓒ FADD Architects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부유한 이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폭이 넓은 창문에 더 많은 세금을 매기는, 이름하여 ‘창문세’를 신설했다. 영국에서는 창문의 개수에 따라 세금을 책정했다. 당시 유럽은 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못해 유리가 대량생산되던 시기가 아니었고, 창문을 ‘많이 둘 수 있다는 것’은 즉 ‘돈이 많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윽고 귀족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창문을 없애기 시작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창문 없는 집에 사는 이들은 우울증과 각종 전염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기에 창문이 잠시 사라졌던 이 시기는 오히려 ‘창문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 Ⓒ YYAA 인방보에 의지하지 않고 가로로 긴 창문을 만들 수 있게 된 건,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덕분이었다. 그는 벽이 천장을 받드는 구조가 아니라 콘크리트 기둥을 구조체로 삼은 ‘도미노시스템’을 제안했다. ‘가로로 긴 창’을 필로티(Les Pilotis), 옥상 테라스(Le Toit-Terrasse), 자유로운 평면 (Le Plan Libre), 자유로운 파사드(La Façade Libre)와 함께 5원칙 중 하나로 삼았던 르 코르뷔지에는 도미노 시스템과 함께 이전과는 전혀 다른 건축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냈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 Ⓒ 85 Design 창문 없는 공간을 상상하기 어려운만큼, 창은 우리의 언어 곳곳에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OS의 이름부터 이미 ‘윈도우(Windows)’다. 창을 통해 세상 곳곳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컴퓨터 상에서 어플리케이션을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영역 또한 ‘창’이라고 불린다. 창틀(Frame)은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고 창틀의 모양대로 세상을 보게 하기에,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현대인들이 정치•사회적 의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본질과 의미, 사건과 사실 사이의 관계를 정하는 틀을 프레임(Frame)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 Ⓒ Daniel Von Appen 창이 없었다면 우리는 문을 나서지 않는 한 바깥의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창이 있었기에 우리는 햇빛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비출 수 있었고, 신선한 바깥의 공기로 공간 내부의 탁함을 정화할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 우리는 하늘을, 바다를, 숲을, 거리를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자연과 시야를 선물해 준 오브제, 창문이다.

천장

Ⓒ J.C. Architecture, Siam More, Breeze Center, photo by Lee Kuo-Min 천장 머리 위를 가려 공간에 대한 주도권을 갖다. - 하늘보다 가까이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들이 바다에서부터 육지로 올라오게 되면서,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 세찬 바람과 이따금씩 내리치는 천둥 번개까지 모든 고난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주(住), 주거공간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필요에서 출발했으며, 동굴에서 빠져나온 우리의 조상들은 이를 위해 기둥과 벽을 세우고 천장을 만들어 하늘을 가렸다 Ⓒ ALA Architects, Dipoli, Aalto University Main Building, photo by Tuomas Uusheimo Ⓒ ALA Architects, Dipoli, Aalto University Main Building, photo by Tuomas Uusheimo 신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기 전, 하늘은 무언가 신비롭고 전능한 존재였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와 달을 드리우며 사냥, 채집, 추위와 더위, 빛과 어둠을 좌우했다. 이따금씩 벼락을 내리칠 때는 ‘저 위의 존재가 분노하여 우리에게 천벌을 내린다’고 인식되기도 했다. 이렇듯 초창기 우리의 문명은 ‘하늘’을 신성시하고,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았다. Ⓒ Ménard Dworkind architecture & design, Miss Wong, photo by David Dworkind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그 존재를 이해의 범주 안에 두려 한다. 이에 따라 ‘진짜 하늘을 가로막을 수 있는 우리 머리 위의 가짜 하늘’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머리 바로 위의 ‘이해할 수 있는 하늘’, 천장(天障)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고, 그를 통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 고공디자인, 연세 늘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photo by 이종덕 Ⓒ Navigate Design, Morah 초기의 천장은 움집, 통나무 집 등 바깥에서 수고하는 지붕의 반대쪽, 안쪽 면이라는 의미에 그쳤었다. 공간을 구성하며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천장의 형태를 극복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 실내에서도 위를 바라볼 만큼의 여유가 생긴 이후다. Ⓒ Photo by Vladimir Kudinov on Unsplash 중세 시대에는 종교 건축 분야에서 유의미한 발전들이 이어졌다. 중세의 성당은 무거운 석재 천장을 지탱하기 위해 두껍고 웅장한 벽을 이루었으며, 벽과 천장의 무게로 채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어둡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이 특징이다. Ⓒ Photo by bady qb on Unsplash 한편, 중세 이후 천장의 건축 양식은 격천정(格天井: 격자 모양으로 소란을 맞추어 짠 천장 장식의 방법),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로 대표되는 천장화(天障畵)의 유행이나, 신성한 하늘로부터의 빛 – 햇빛이 건축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천장을 높이고 길고 큰 창을 만드는 방식 등이 유행했다. Ⓒ Arquitetura Nacional, Estudio Pretto, photo by Marcelo Donadussi ⒸHome(2016), AD+Studio, photo by Quangdam 건축기술이 발달하면서 천장은 더욱 다채로운 형태를 띠게 됐다. 건축물은 층수를 높이며 2층의 바닥이 곧 1층의 천장이 되었다. 또한, 자연에서 하늘이 땅 위로 빛을 내리쬐듯 조명을 천장에 시공해 실내에 있을 때도 햇빛이 머리 위를 비추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빛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대부분 실내 공간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아래로 조명을 비추며 공간 내부를 밝힌다. 이렇듯 근현대의 천장은 외부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은 물론, 그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가지며 하늘보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Studio Modijefsky, The Roast Room, photo by Maarten Willemstein Ⓒ SODA Architects, BLUFISH restaurant, photo by CHEN Xiyu Ⓒ Murado & Elvira Architects, Baiona Public Library, photo by Imagen Subliminal 하늘이 흐리거나 맑거나, 밝거나 어두울 때 우리의 기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듯, 천장도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공간에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공간에서 천장의 높이가 사용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의 한 교수는 각각 다른 천고를 가진 방에 피실험자들을 입장시키고 문제 해결 능력을 실험했다. Ⓒ APOLLO Architects & Associates Co., Ltd., GRID, photo by Masao Nishikawa 두 집단 중 천고가 더 높은 방(3m 높이)에서 문제를 푼 A 표본 집단은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천장이 낮은 방(2.4m 높이)에서 문제를 푼 B 표본 집단은 정해진 범위의 일을 꼼꼼히 처리하는 데 강점을 보였다. 많은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이 그간 공간을 연출하는 방식에 있어 개방감이 느껴지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할 때는 천장을 높게, 아늑한 분위기나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공간은 천장을 낮게 구성해온 의도가 실험을 통해 실질적인 효과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DH Design Architecture Inc. Interior Design, Tutorabc Taipei Office and Experience Center 하늘이 내리는 변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천장을 만들고, 때로는 천장에 그림을 그리거나 창을 내는 등, 여러 방식을 통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게 됐다. Ⓒ OFFICIAL, Civitas Capital Group, photo by Robert Yu 우리의 머리 위를 가림으로써 공간에 대한 주도권을 가져다준 오브제, 천장이다.

계단

Ⓒ Zoltan Kovacs 계단은 근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석기 시대 이후 인류가 ‘건축물’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짓기 시작하면서, 계단은 늘 인류 곁에 있었다. ‘세계 최초의 도시’라 불리는 요르단의 예리코(Jericho)에서는 무려 기원전 8,000년 경 만들어진 계단이 발견되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와 황허. 문명이 발달한 곳에는 늘 계단이 있었다. Ⓒ Yiyun Ge 인류 최초의 계단은 ‘발자국’이었다고 여기는 시선도 있다. 인간들이 계속 반복해 고저 차가 있는 한 지형을 오갔고, 그 발자국들이 모여 만든 풍화로 자연스레 계단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계단은 ‘물질적 목적을 극대화하기 위한 인공적 도구’라기보다는, ‘자연 지형에 순응해서 맞춘 노력의 산물’이다. Ⓒ Biasol 계단을 다층 건물 내외부를 오르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본 ‘기능주의적 인식’은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전의 ‘계단의 역사’는 계단의 역사라기보다는, 계단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역사에 가까웠다. 고대로 돌아가 보자. 이때의 계단은 ‘하늘을 섬기기 위한 조형물’이었다. 하늘을 향해 높게 뻗어가는 계단은 지극히 종교적인 상징의 역할이었다. 바벨탑과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at)가 대표적인 예. 이런 시선은 후세에도 남아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천국으로 가는 계단)’ 등 곡에 표현되기도 했다. Ⓒ Elii 중세에는 ‘나선형 계단’만이 사용되었다. 로마 문명의 쾌락주의가 점차 쇠퇴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선형 계단은 점차 거대화돼, 봉건영주들의 지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이는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저서 <기호: 개념과 역사>에서 ‘건축 기호학’에 관해 계단을 예로 들어 설명한 부분에서도 읽을 수 있다. “계단은 그 자체의 기능을 외시하며 그것을 오르는 사람의 지위를 내포할 수도 있다.(화려한 계단, 등대의 나선형 계단 등.)” 대부분 건물 외부에 자리했던 계단은, 이 시기부터 실내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 Rapt Studio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며 계단은 점차 정교화되었다. 18세기는 ‘공공성’이라는 개념의 등장으로, 공공물로서의 계단을 비롯한 건축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시기다. 19세기에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더 높은 건물’과 ‘더 높은 계단’을 만들어냈다. 건물과 계단이 인류가 엘리베이터에 익숙해진 후, 계단은 불편한 무언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쉽게 계단을 대체할 것들이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고, 계단을 오르는 일은 그에 비해 어렵고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 Fala Atelier 그러나 단층이 아닌 한, 계단 없는 공간을 떠올리는 일도 쉽지 않다. 계단의 대체재는 항상성이 없고, 불안정성을 띠고 있으며 때로는 그 자체가 사고의 위험이 되기도 한다. 전력이 끊어지면 엘리베이터는 단 한 층도 오고 갈 수 없다. 때때로 낡은 승강기에는 추락의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다. 계단만이 오래도록 굳건하게 그 자리에서 우리를 위, 또 아래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오늘 온종일 지나친, 또 밟아온 계단의 수를 생각해보라. 아무리 엘리베이터가 발달되어 있다고 한들, 계단 없이 살아낸 날을 단 하루라도 꼽기 어려울 것이다. 계단은 우리를 하루에도 수십번씩 위아래로 이끌며, 우리에게 더 높은 일상을 선물하고 있다.우리에게 다른 높이를 선물해 오브제, 계단이다.

Ⓒ Christian Stahl 문이 없는 공간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공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그 공간은 다른 세상으로부터 완벽히 격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이라는 개념 없이는 공간 자체가 성립 할 수 없다. 그런 건물을 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누구나 알 수 있다. : Ⓒ Biasol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한데 모아 우리는 의식주라고 불러왔다. 불확실한 기후와 위험한 환경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옷(衣),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적당한 먹을 것과 마실 것(食).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집(住). 집이 없다면 옷을 갈아 입을 공간도, 안전하게 식사를 즐길 공간도 없다. 또 그 집에는, 안락한 실내로 인류를 이끌고, 닫혀 있을 때는 인류를 보호해주는문이 있다. 문은 인류에게 이렇게나 중요한 존재였다. 인류 최초의 건물은 움집이었다. 선사시대의 인류는 바닥을 파 그 위에 짚과 나무 기둥을 이용해 움막을 만들었다. 출입구(doorway)는 있을지언정, ‘문(door)’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차차 이 움집에서 벗어나 나무를 조금 더 정교하게 다루는 건축이 시작되면서, 문의 역사 역시 시작된 것이다. : Ⓒ Lemur 인류 최초의 문으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3063년경 만들어진 문이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발견된 이 문은 153cm의 높이, 88cm의 너비로 포플러 나무로 제작되었다. 이 문은 취리히 호수(Lake Zurich)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집의 일부였으며, 인근에 존재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는 신석기 마을(Neolithic villages)의 흔적이다. 지역에 따라 화강암, 화성암 등의 돌이 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최초의 ‘석제문’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였던 수메르에서 기원전 2000년경 만들어진 것이 발견되었지만, 무게와 가공의 어려움이라는 특성 때문에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소재가 되지는 못했다. 문자가 생기고 건축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이후에야 돌과 철, 유리와 나무 등이 공간에 따라 교차하고, 어울려가며 문의 소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현대에 이르러서 문은 미닫이, 여닫이, 홑문, 곁문 등 고전적 형태 뿐 아니라 폴딩 도어, 자동문 등의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 Ⓒ Daniel Frank 문이 단지 ‘열고 닫는 것’의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문은 상징적으로도 큰 역할을 해왔다. 솔로몬 왕은 궁전의 문을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 황금을 입혔다. 왕으로서의 권위와 위세를 자랑하고자 함이었다. 이집트 무덤 속 그림에서도 문은 ‘상징적 의미’였다. 이 그림 속의 문은 당시 내세로 가는 출입구로 여겨졌다. 프랑스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세운 것으로, 당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일종의 승전비와 같은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도 문이 상징으로 쓰인 사례가 적지 않다. 돈의문은 일제강점 당시 반일을 뜻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문은 이처럼 때때로 공간의 주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역할을 해왔다. : Ⓒ Fala Atelier 인류가 오래도록 문과 함께 해온 만큼, 문은 인류의 심리와 정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은 때론 환영의, 때론 경계의 대상이 된다. 문을 등 뒤에 두고 일을 할 때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연구는 문이 인간의 심리 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 Ⓒ Biasol 언어 습관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마음의 문을 열다/닫다’라는 비유는 문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드러낸다. 비단 한국어 뿐만이 아니다. 영어의 ‘Door of Hope’, ‘Door of Faith’, ‘Door of Love’ 등과 같은 표현 또한 그렇다. 부탁을 거절하는 행위를 ‘문을 닫는 것’에 비유한 심리학 용어를 떠올릴 수도 있다. 작은 부탁부터 시작해 긍정의 대답을 얻어내기 시작하면 큰 부탁에도 쉽게 긍정의 사인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뜻하는 풋 인 더 도어(Foot in the door) 전략, 먼저 무리한 부탁을 한 뒤, 거절 이후 원래 목표로 했던 부탁을 하는 도어 인 더 페이스(Door in the Face) 전략 등이 바로 그 예이다. : Ⓒ MiMool Arguitectura & Design de Interiors 문을 담은 표현은 인류가 문과 함께하는 한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일어나 몇 개의 문을 열고 닫았는가. 얼마나 많은 문을 지나쳤는가. 헤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그만큼 이 오브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이 없이는 생존조차 장담하기 어렵다. 집과 음식, 의복 없이 생존할 수 없듯이. 문은 그렇게 우리를 공간으로 이끌고, 타인으로부터 공간을 보호하며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공간으로 이끌고,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오브제, 문이다.

바퀴

Ⓒ Photo by Terry Jaskiw on Unsplash 선사시대에 발명되어 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오늘날 첨단 기술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발명품이 있다. 바퀴는 비록 그 자체만으로 쓰이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일상 속 곳곳에 존재하며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돕는다. 수확물을 나르거나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드는 일부터 미세한 기계장치를 구동하거나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역할까지. 바퀴는 화학 작용 속 촉매의 역할처럼 인류 산업 기술의 발전을 끝없이 도와왔으며, 중력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굴러갈 것이다. Ⓒ Normann Copenhagen 무거운 물체는 밀 때보다 굴릴 때 마찰력이 작아지고, 이에 따라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된다. 우리의 조상은 이런 점에 주목해 굴리기 좋은 원통 형태의 목재를 ‘굴림대’로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바퀴의 원형이며, 세계 곳곳의 고대 문명에서는 구하기 쉽고 만들기도 간단한 굴림대를 통해 무거운 물건들을 나를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 역시 굴림대를 통해 나일강 유역의 대리석을 옮겨 피라미드를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퀴는 기원전 2000년,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바퀴통(바퀴 축을 바퀴에 고정시키는 부분)과 테두리 바퀴를 연결하는 ‘바퀴살’이 등장하면서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바퀴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는 기존에 사용하던 형태보다 훨씬 가볍고 충격 완화 효과가 좋았다. 바퀴살을 가진 바퀴는 유럽, 중국 등 세계 여기저기에서 사용되었다. Ⓒ Photo by Uilian Vargas on Unsplash 바퀴는 노면과 맞닿으면서 필연적으로 마모된다. 바퀴의 마모 속도를 늦추고자 했던 노력은 기원전 100년경 켈트족이 나무 바퀴의 테두리에 철판을 두르며 시작됐다. 철판을 두른 바퀴는 더 천천히 닳긴 했으나, 딱딱한 철판이 지면의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화물이나 탑승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적당히 딱딱해서 쉽게 마모되지는 않지만, 적당한 탄성이 있어 지면의 충격을 완화/분산시킬 수 있는 물질. 바퀴에는 그런 물질을 둘러야 했다. 산업혁명은 다른 많은 것들과 더불어 바퀴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48년, 고무의 힘과 탄성을 눈여겨 보던 스코틀랜드의 톰슨(Robert W. Thopmson)은 생고무를 쇠로 된 바퀴에 접목했고, 이윽고 1888년 영국의 수의사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이 공기 타이어를 발명했다. 이런 공기 타이어, 고무 타이어를 자동차용으로 개량한 것은 프랑스의 미쉐린 형제(André& Édouard Michelin)다. 미쉐린 형제의 타이어를 장착한 차량은 자동차 경주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였고, 전 세계 자동차 바퀴는 공기압 타이어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금속 휠과 휠을 감싸는 고무 타이어. 당시에 정착된 차량용 바퀴의 형태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 Photo by Fabio Bracht on Unsplash 자동차, 기차, 손수레를 움직이게 하는 바퀴 외에도 바퀴는 기계부품 속에서 톱니바퀴로 작용한다던가, 작동 형태를 바꿔 도르래로 활용되는 등 인류의 산업 기술 면면에 흔적을 남겼다. 바퀴는 이제 인간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 되어, 부재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며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다. Ⓒ Normann Copenhagen 스스로의 몸을 지면 위에 굴리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오브제. 바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