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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Glass Mix Motion Cristall ⓒ Normann Copenhagen-1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유리를 마주한다. 꽃을 담는 화병부터 시력의 교정을 돕는 안경, 공간 너머의 풍경을 비추는 창까지 유리는 우리의 일상을 담는다. 이처럼 쓰임이 많아 우리와 밀접하게 닿아있는 유리는 무엇이든 반영·투과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런 유리의 특성 덕분에 우리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공간을 넘어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오브제, 유리를 소개한다. Cognac Glass ⓒ Normann Copenhagen-6 어릴 적 눈이 나빠지기 시작한 저는 어머니와 함께 첫 안경을 맞췄습니다. 콧대를 간질이는 안경대는 불편했지만, 난시가 심했던 저는 그제서야 아름다운 것들을 또렷이 볼 수 있었습니다. 부서지는 햇빛과 빛나는 나뭇잎, 찬란한 바다까지 안경이 발명 이래 7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 것은 이러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요? Mjolk Zen Han ⓒ Nichetto Studio 사실 초기 안경은 에메랄드나 크리스털 등을 볼록렌즈로 깎은 원시용 안경이었습니다. 15세기이후 산업화의 단계에 접어든 유리는 더이상 사치품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브제가 되었지요. 특히,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안경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각종 서적을 보기 위해 안경이 필요했어요. 인류가 자연적 시력의 한계를 넘어서 대상을 마주하게 된 것은 유리 덕분입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수차례 자연의 한계를 넘어왔습니다. 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주먹도끼부터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게 만든 바퀴, 생활 습관을 바꾼 전기 등 여러 발명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지요. 그중 유리의 발명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공간을 넘어 삶을 변화시킨 유리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을까요? Mr Perswall Temperature 15grader high ⓒ Form us with Love 유리는 크게 일반 유리와 무늬유리, 망입유리, 복층유리로 나뉩니다. 대중적으로 쓰이는 유리 중 하나인 판유리는 일그러짐이 없고 두께가 일정합니다. 무늬유리는 롤아웃 공법으로 제조되며, 판유리의 한쪽 표면에 요철을 넣어 여러 모양의 무늬를 음각한 반투명 유리입니다. 빛이 무늬에 따라 확산되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지요. 두꺼운 유리에 철망을 넣어서 만드는 망입유리는 파손되더라도 파편이 흩어지지 않으며, 화재 시 연소를 방지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복층유리는 두 장 혹의 세 장의 유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접착해 밀폐하고, 그 사이에 건조 공기를 봉입한 유리입니다. 단열과 방음 효과가 크며 공기층의 두께와 사용되는 유리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가능합니다. Glas Italia_Shimmer ⓒ Normann 유리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서 유리 조각과 유리 막대기가 발굴된 것입니다. 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남부 바빌로니아의 왕 다르 오마르의 점토판 문서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가루에 다양한 물질을 섞어 채색 유약인 연유를 제조하는 방법에 대해 작성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유리 제조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경우, 기원전 5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유리의 생산이 시작됐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에는 세계 최대의 유리 생산지로 부상했지요. 당시의 유명한 유물로는 유리 암포라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유리 속에 모래나 진흙으로 만든 모형을 담근 후 유리가 식어 굳어지면 모형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된 유리는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리의 중심 지역이 차츰 이동하는 경향이 나타났어요.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는 블로잉(Blowing) 기법이 발명되었습니다. 철 파이프의 앞 끝에 유리를 말아 올려 둥글게 한 후 반대편 끝에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풍선처럼 부풀리는 방법이지요. 당시의 기술자들은 이 방법을 활용해 보다 많은 양의 유리를 수월하게 생산할 수 있었고, 다양한 유리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Glas Italia_Shimmer ⓒ Normann Copenhagen 13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비잔틴제국의 유리 기술자들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정착하게 됩니다. 뛰어난 솜씨를 가진 그들은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세계를 누비며 판매할 화려한 유리 제품을 만들었어요. 유리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섭씨 500도까지 열을 발산하는 용광로가 필요합니다. 당시 베네치아 대부분의 건물은 목조로 이루어져 화재가 발생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 정부는 유리기술자들을 무라노 섬으로 이주시켰습니다. 14세기 초, 무라노 섬은 ‘유리의 섬’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무라노 섬에서 제작된 사치스럽고 섬세한 유리 제품은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어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어요. 그 당시의 보석인 셈이지요. Kartell Jellies Table extension ⓒ Normann Copenhagen 사실 평소에 유리를 특별하게 여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주변에 흔히, 여러 형태로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유리가 주는 빛의 형태는 경이롭기만 합니다. 스페인에 위치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제가 머물렀던 장소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입니다. 자연을 반영하는 유기적인 곡선, 정교한 조각, 그중에서도 유리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는 시간에 따라 매 순간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찬란하게 흐르는 빛이 쏟아져 피부에 닿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경건하게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신앙심을 보았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재료에 안료를 넣어 만든 유리나 겉면에 색을 칠한 유리를 기하학적이거나 장식적인 형태 또는 회화적 도안으로 잘라 만든 것입니다. 고딕 건축의 구조상 거대한 창을 달 수 있어 스테인드글라스가 벽화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빛은 성스러운 효과를 주어 교회 건축에서 주로 사용했지요. Crystal Rock 2014 LASVIT ⓒ Arik Levy 이러한 역할을 하던 유리는 현대 건축에서 벽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유리가 주철과 연철, 강철과 결합해 공장에서 생산되기 시작하며 유리 건축물이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1914년 벨기에인 에밀 푸르콜은 수직 방향으로 끌어올리는 공정을 개발해 넓은 판유리를 생산했습니다. 이로 인해 여태 건축물을 이루는 오브제와는 전혀 다른 투명함이 가능하게 되었어요. 건축가들은 보다 더 투명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유리판의 네 모서리에 구멍을 뚫고 나사로 구조체에 달아맸습니다. 창틀이 최소화된 유리 벽을 구현한 것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유리 건축물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공정함과 투명함을 반영하며, 건물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할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유리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김리오 기자

원목

Patio set ⓒ Bertjan Pot 정성과 시간은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애정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지요. 원목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오브제입니다. 작은 씨앗은 싹을 틔워 어린 나무가 되고, 어린나무는 시간이 흘러 큰 나무가 됩니다. 다 자란 나무를 베어 켜켜이 잘라 말리면 비로소 원목이 탄생해요. 세상에 같은 사람이 없듯 같은 나무도 없는 것처럼 단 하나뿐인 나무는 제각각 다른 형태를 가진 특별한 원목이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목은 사용할수록 고급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며 늘 우리 곁에 있겠지요.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오브제의 높은 가치를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먼 미래까지 늘 우리의 공간에 속하는 원목, 진정 인류가 가장 사랑한 재료인 것입니다. Seating-Noor ⓒ SB_1 저의 부모님은 보성의 작은 마을에 시골집을 사두셨습니다. 사실, 부모님이 아니라 어머니가 사신 거라고 해야 정확하지요. 여느 어머니처럼 평생을 착한 딸로, 착한 아내로, 착한 어머니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자신만의 별장이 필요했습니다. 타인에게서 쏟아지는 감정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요. 누구의 말도 누구의 행동도 겪지 않고 싶어 했어요. 그렇게 어머니는 작은 대나무 숲과 앞마당이 딸린 옛 한옥을 찾았습니다. 제 기억 속의 첫 원목은 아마 집 안 거실의 테이블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손이 닳도록 매만졌던 테이블, 코를 가까이 대면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낳고 길러진 제게 집안의나무란 생소하고, 낯설지만 어머니를 따라 자꾸 매만지게 되는 것이었어요. 저는 때로 말이 없는 것이 큰 위로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Ton Split chairs ⓒ Arik LEVY 나무 냄새를 다시 맡게 된 건 어머니의 한옥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꽤 오래된 집이라 서까래와 기둥, 마루는 원목으로, 벽은 황토가 발려 있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먼 곳으로 여행을 가듯, 드문드문 한옥을 찾았습니다. 건축을 하시는 아버지는 사람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았던 한옥을 천천히 고쳐 나갔어요. 어머니가 애정하던 원목은 대부분 그대로 둔 체로 아버지는 황토를 다시 바르고, 전구를 달고, 돌을 다듬고, 부모님이 집을 수리할 때면 여느집보다 단단했을 과거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떠한 인공적인 재료도 없던 그 옛날 어떻게 집을 만들었을까 하면서요. 어느 방향에서든 시원하게 통하는 문과 보온·습도를 조절하는 창호, 따스하고 효율성 높은 구들장까지, 한옥은 과학적입니다. 가족들이 마루에 두루 앉아 별을 세던 여름밤, 여느 날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새삼 선조들이 현명했음을 느꼈습니다. Typecast Chair ⓒ Philippe Malouin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집안에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집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들보부터 지붕을 받쳐주는 서까래, 집을 지지하는 기둥과 대청 바닥까지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했지요. 굽어진 것은 굽은 대로, 옹이가 있는 것은 옹이가 있는 대로 원목 그대로를 사용한 한옥은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WALLPAPER ⓒ Jaime Hayon 우리의 공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원목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요? 처음 인류는 집을 이루는 오브제로써 돌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부족하던 시대에 크고 무거운 돌을 원하는 곳으로 옮기는 것은 다소 벅찬 일이었겠지요.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인들은 최초로 의자와 테이블, 침대 같은 가구를 만드는 데 원목을 사용했습니다. 돌보다 훨씬 가벼워 이동하기 쉽고, 구하기도 쉬운 오브제가 나타난 것입니다. balance box group ⓒ Philippe Malouin 원목은 공구의 발달과 목재의 가공기술이 축적되며 쓰임새가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왕좌나 의자, 궤 등 호화스러운 장식은 모두 고대 이집트 지배층의 권위나 격식을 나타냈어요. 이들은 미라를 만든 뒤 음식, 옷, 가구를 함께 넣어 다음 세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원전 2000년경, 본격적으로 원목을 이용한 가구를 만들었던 그리스인들은 과거 이집트인들처럼 화려하고 장식적이지는 않지만, 단순하고 실용적인 곡선과 둥근 모서리를 적용해 인체에 적합하도록 발전시켰습니다. 커다란 변화 없이 중세 시대를 보낸 원목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며 혁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상 최고의 예술 시대라 평가 받는 르네상스 시대에는 균형과 조화에 중점을 두어 조각을 풍부하게 사용했어요. 뿐만 아니라 침대와 소파, 수납장 등 원목을 사용한 대부분의 가구에 우화나 신화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 넣어 화려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했지요. BellLight ⓒ Sebastian Herkner 원목은 테이블, 의자, 침대, 수납장 등 여러 오브제로, 최근에는 바닥재, 벽재, 천장재, 몰딩 등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원목이 가볍고 가공하기 쉬우며, 비중에 비해 강도가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기 중의 오염물질을 끌어들여 공기정화에 도움을 주며, 수축과 팽창을 거듭해 실내 습도를 조절하지요. 그뿐만 아니라 소리를 흡수해 소음 방지에도 탁월하고, 특유의 따뜻하고 안락한 분위기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등 다양한 순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Friends ⓒ Fuwl 나뭇결이 아름다워 의자와 몰딩재로 자주 사용되는 단풍나무는 무겁고 단단해 충격에도 큰 손상을 입지 않습니다. 착색 처리가 용이하며, 광택이 잘 나고 밝은 적갈색을 띄지요. 오크나무는 밝은 갈색으로, 몰딩재와 단판재로 많이 사용됩니다. 화이트 오크나무와 브라질리언 오크나무가 있으며 내구성이 높고 균일한 강도를 가집니다. 내후성이 뛰어난 소나무는 뒤틀림이 적고 결이 곧습니다. 예부터 한옥에 쓰이는 나무는 소나무로, 소프트우드 중 가장 강도가 높아 건축 자재로 활용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장점만큼 여러 종류를 가진 오브제, 원목입니다. Bedroom ⓒ John Kelly_3 김리오 기자

타일

타일(Tile)은 점토를 구워 만든 얇은 판이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겉이 반들반들해 수분을 흡수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덕분에 청소와 관리가 쉽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런 특징에 힘입어 화장실, 목욕탕, 부엌 등에 자주 사용되며 강도와 특징에 따라 건물의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 색상을 만들 수 있어 바닥이나 벽을 장식하는 데에 많이 쓰인다. 모자이크화(mosaic 畵)의 재료로도 쓰이는데 교회나 성당, 건물의 외벽 등에서 볼 수 있다. 흔히 재료와 굽는 온도 등에 따라 도기질 타일, 자기질 타일, 석기질 타일, 유리질 타일 등으로 나눈다. 타일의 사용은 인류의 문명에 비견될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4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와르카(Warka)의 모자이크에서도 타일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타일은 다양한 모습과 용도로 인류와 함께해 왔다. 특히나 오래된 서양의 그림에서는 타일을 사용한 과거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피터르 드 호흐(Pieter de Hooch, 1629~1684)의 그림들이다. 네덜란드 중산층 가정의 일상생활을 화폭에 담았던 그의 그림들에서는 바닥을 수놓은 다양한 종류의 타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MARVEL PRO © 유로세라믹(Euroceramic, www.eurotile.co.kr) a floor © Hotel Cort(www.hotelcort.com) BISAZZA CONTEMPORARY CEMENT TILES © Jaime Hayon MAISON © 유로세라믹(Euroceramic, www.eurotile.co.kr) Mutina Tex 010 HR © Raw Edges 기사 노일영

침대II

짚이나 톱밥을 채워 넣은 자루에서 시작된 침대는 이제 최첨단 과학 기술이 집약된 제품으로 거듭났다. 금속 스프링이 처음 사용된 19세기 이후로는 워터베드, 에어 매트리스, 라텍스, 메모리폼 등 다양한 매트리스가 발명됐다. 덕분에 요즘의 침대는 예전처럼 여러 겹의 매트리스와 담요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 장의 매트리스면 충분하기 때문에 쉽고 다양한 방법으로 침대를 꾸미거나 관리할 수 있다. 그저 매트리스 위에 씌우면 되는 화려한 매트리스 커버는 겉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매트리스를 순식간에 여왕의 침대처럼 만들어 준다. 요즘은 쉽고 간편하게 여왕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시대다. 오래전 여왕이 누웠던 침대보다 지금 우리가 눕는 침대가 더 편안할 것이다. 그래서 침대는 이 시대의 증거다. 처음 침대가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모닥불을 피우고 땅바닥에서 잠을 자던 이들이 처음으로 지금의 침대와 비슷한 자루를 만들어 그 위에서 자던 시절의 일이다. 적게는 다섯 명에서 열 명 정도의 사람이 한 침대를 썼다. 침대가 생기기 전부터 신분이 높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서로를 보호하고 체온을 나누기 위해 함께 모여 잤고 이 전통이 침대가 생긴 이후에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침대는 온 가족이 함께 쓰는 물건이었고 가끔은 손님들도 함께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사실 지금과 가장 다른 것은 침대의 크기가 아닌 사생활의 개념이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유럽에서는 사생활을 존중해야 할 가치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공 침대 © 고트레 Nick Bed © Luca Nichetto, Molteni&c dulux Colour Futures 2017 Denim Drift © akzonobel dulux Colour Futures 2017 Denim Drift © akzonobel dulux Colour Futures 2017 SHARED INDIVIDUALISM © akzonobel 기사 노일영

테이블II

의자는 핵심이다. 의자는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주인의 권위를 드러낸다. 의자에 앉는 이가 공간의 주인이다. 그래서 의자는 권위적이고 이기적이다. 테이블은 다르다. 테이블은 주인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친목과 대화의 공간을 만드는 테이블의 덕목은 권위가 아닌 공유와 희생이다. 테이블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식탁이 바로 그 예다. 모든 식탁은 그래서 친목과 대화의 장이다. 다양한 크기와 높이, 모양으로 변주되지만, 음식을 나누는 모든 테이블은 기본적으로 식탁이다. 모든 테이블의 원형은 식탁이다. 커피 테이블, 사이드 테이블, 소파 테이블, 티 테이블, 콘솔 테이블 등등 세세하게 나누면 끝도 없이 나눌 수 있을 만큼 많은 분류가 있지만 결국 그 시작은 식탁이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던 제단에 둘러앉아 혹은 둘러서서 음식을 나눠 먹던 신성한 의식이 모든 테이블의 기원이며 식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바쳐진 제물은 모두 가장 풍요롭고 가장 귀한 것들이었다. 그 제물을 올려둔 제단 즉, 테이블도 마찬가지였고 의식을 마친 후 귀한 음식을 먹던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CCassina Torei © nichetto studio G&R RULLI © nichetto studio Marlon and Stella Armchair © nichetto studio TA BLE HORS SERIE STUDIO MONSIEUR POUR HORS PISTES © STUDIO MONSIEUR, HORS PISTES ET FABRICE SCHNEIDER Palette table © Jaime Hayon 기사 노일영

조명2

Industrial © KaschKasch 공간 디자인에는 조명 계획이 당연하게도 포함된다. 특히 공간 연출에 있어 조명은 필수적인 고려 대상이다. 천장 한가운데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 식탁 위의 작은 펜던트 조명, 혹은 흔한 형광등까지 뭐가 됐든 조명은 어쩌면 환경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은 어떤 환경도 만들어내지 못 하기 때문이다. 조명은 우리가 사물과 환경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물의 형태와 색을 결정하는 것도 어쩌면 조명이다. 조명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조명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류가 알게 된 지 이제 100년 정도 지났을 뿐이다. fa ndango in white © Hive, Indahdesign Chinoz © Jaime hayon Cherry © KaschKasch, Jessewchen 기사 노일영

조명

Maija © SANTACOLE 조명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정이나 사무실에 걸린 형광등,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자동차의 전조등 정도일 것이다. 혹은 무대 위 스타에게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나 야구장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서치라이트도 있을 수 있겠다. 무엇을 떠올리든, 모든 조명의 공통점은 빛이다. 빛 공해, 조명 공해라는 말까지 쓰일 만큼 지금이야 아주 흔한 것이지만, 원래 빛은 태양과 달, 별 가끔은 특이한 동식물 등에서나 찾을 수 있었던 아주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神)이나 왕(王), 선(善), 미인(美人)을 부를 때 대신 쓰이던 말이기도 하다. Parachilna © Jaime Hayon PULPO BOULE SMALL FAMILLE © Maison Objet January 2017 Lampada Hayon, Saint Louis © Jaime Hayon KURAGE © Nichetto Studio, Kasia Gatkowska DUB grau © KaschKasch 기사 노일영

수납장

Tudor Low Cupboard © Joost&Kiki, joostandkiki.nl 옷장을 뜻하는 워드로브(Wardrobe), 서랍장으로 번역되는 드로워(Drawers), 궤나 상자를 부르는 체스트(Chest), 책이나 식기 혹은 작은 물건을 보관하는 선반(Shelve) 등을 통틀어 스토리지(Storage), 수납 가구라 부른다. 이런 대표적인 가구들 이외에도 캐비닛(Cabinet), 오토만(Ottoman), 랙(Rack), 보드(Board) 등 다양한 가구를 모두 스토리지 또는 수납 가구라 부른다. 한국의 장롱(欌籠) 역시 마찬가지다. 이름과 형태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 수납, 보관, 저장 뭐라 부르든 결국 물건을 두는 물건 혹은 물건을 두는 기구다. IAlcor Storage Unit, Maxalto © Antonio Citterio, citterio-viel.com Job Cabinet © Studio Job, www.studiojob.be T Table by Bosa © Jaime Hayon, www.fritzhansen.com BoConcept Copenhagen wall system © Morten Georgsen, www.boconcept.com 뉴월플렉스2O 콘솔선반장 SET © Hanssem, mall.hanssem.com 기사 노일영

테이블

테이블(Table)이라는 말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본다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Table’을 검색하면 5개의 명사, 2개의 동사, 376개의 숙어, 9만 개에 가까운 예문이 나온다. 그만큼 많이 쓰이고 그만큼 다양하게 쓰인다. 언어와 사상을 분리해서 여길 수 없듯 언어와 생활도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테이블은 단어로 그리고 실제 물건으로 그만큼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그리고 다양하게 쓰인다. 당장 눈에 보이는 테이블을 세어보자. 식탁, 책상, 티테이블, 협탁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또 다양한 모양으로 온통 주변이 테이블 천지라는 걸 알 수 있다. 기사 노일영

침대

15세기 즈음 유럽, 모닥불 주변에 모여 자던 이들이 오늘날 침대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만들어 냈다. 당시의 ‘침대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우리가 지금 쓰는 일반적인 침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훨씬 컸다. 요즘 침대는 한 명 혹은 많아야 두명이 사용하는 것을 기준으로 만들지만 당시에는 기준 인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섯 명, 많게는 열 명 안팍의 사람이 한 침대를 사용했을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사용했고 종종은 손님들까지 한 침대를 사용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훨씬 불편했다. ‘침대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사실 기껏해야 짚을 채워 넣은 자루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어떤 이들은 짚 대신 톱밥을 넣어 만들기도 했다. 기사 노일영

의자 I

의자만큼 많은 디자이너들의 관심을 받은 가구가 또 있을까? 많은, 정말 많은 디자이너들이 의자를 사랑하고 또 집착했다. 역사로 기록된 의자와 디자이너가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수없이 많은 변형과 수정 그리고 재창조를 거치며 오늘까지도 사랑받는 의자와 디자이너도 있다. 임스 부부(Charles & Ray Eames)의 걸작, 임스 라운지 체어(Eames Lounge Chair)는 1956년부터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와 유력 인사들이 여전히 모던한 이 의자를 사용하는 모습을 영화나 미디어를 통해 종종 볼 수 있다. 오래도록 사랑받는다는 점에서 많은 디자이너가 의자를 사랑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사 노일영

경험하는 바닥

침대에서 혹은 이불에서 눈을 뜨고 다시 눕기 전까지,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동안 우리는 적어도 어딘가에 닿아있다. 시선이 어디를 향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심지어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바닥 위에 있다. 앉고 눕고 서 있는 모든 시간을 우리는 바닥 위에서 보내는 것이다. 집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벽이나 천장과는 다르게 바닥이 유독 특별한 것은 우리가 거의 모든 시간을 바닥에 닿은 채로 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닥은 만지거나 몸에 닿을 일이 거의 없는 벽이나 천장과는 다르게 다분히 감각적으로 경험된다. 같은 이유로 바닥은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요소이며 동시에 가장 홀대받는 요소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가 발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Japan Open-Air Folk House Museum © TANAKA Juuyoh 기사 노일영

살아있는 벽

살아있는 벽 - 기억과 감정, 기능의 캔버스 인류가 수렵채집을 하던 시기에는 짐승의 뼈나 나뭇가지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풀이나 짐승의 가죽을 덮는 방식으로 벽을 만들었다. 최초의 인공적인 벽은 차가운 바람과 흙먼지를 막을 수는 있었지만, 야생 동물의 공격이나 적의 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 장소에 오래 정착해 살아야 할 필요가 없었던 시절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생존 방식이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면서 변화가 생겼다. 한곳에 오래 정착해 살기 위해선 벽의 내구성이 좋아야 했고, 집 안에 잉여 생산물을 저장했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이 늘었던 것이다. 취재 노일영

발코니, 베란다 혹은 테라스

마당이 있는 한국의 전통 주택을 보통 중정주택(中庭住宅)이라 부른다. 중정주택은 집 한가운데에 마당이 있는 집을 말한다. 전통 한옥의 안마당 혹은 앞마당이나 ‘ㅁ’ 자형 주택의 안마당을 떠올리면 된다. 마당을 중심으로 둘러싼 건축은 구조상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마당이 있는 주택, 집의 중심에 마당을 두는 중정주택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중동 심지어 이집트와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었다. 생각해보면 예전 우리 조상들은 마당에서 참 많은 일을 했다. 마당은 때로 장독대가 되기도 했고 빨래를 널거나 김장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혹은 잔치를 벌이고 온갖 놀이를 즐겼던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공간이었다. 기사 노일영

집안으로 내려온 하늘 ‘천장’

천장은 공간을 나누는 벽들을 모아 하나의 공간으로 마무리 짓는 건축의 마지막 요소다. 기능적으로는 직사광선, 비, 바람과 같은 하늘로부터의 위험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며 공간을 쾌적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런데 당장 집과 사무실의 천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천장을 쉽게 간과하고는 한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질감인지 또 어떤 높이로 만들어져 있는지 잘 신경 쓰지 않기에 당연히도 잘 모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장은 약간의 차이만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크게 바꾼다.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물론 삶의 질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하늘로부터의 위협을 방어하는 건축 요소로서, 공간을 안전하고 아늑하게 만든 천장은 그러나 하늘의 다른 요소까지도 막아버렸다. 바로 푸른 하늘과 따듯한 햇빛, 달빛과 별빛이다. 땅과 작물, 공기만큼이나 중요한 하늘을 막아버린 천장을 사람들은 불안하게 여겼다. 공간의 안정성과는 별개로 자연이나 신(神)과의 유리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천장에 어떤 상징적 요소도 남지 않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장으로 유발된 이 심리적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손쉬운 방식은 천장을 하늘과 닮게 만드는 것이었다. 천장에 하늘과 비슷한 색을 칠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부터 하늘과 닮은 둥근 모양의 천장을 만들거나 천장에 구멍을 내는 방식까지 그 표현 방법의 다양함과 관계없이 목적은 오직 천장을 하늘과 최대한 닮아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진짜 하늘은 아니지만 진짜에 버금가는 하늘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천장으로 하늘을 만드는 이런 행위는 방에 야광 별을 달아놓거나 태양을 닮은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요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천장을 뜻하는 영어 씰링(Ceiling)은 하늘을 뜻하는 프랑스어 씨엘(Ciel)에서 유해했다. 처음부터 하늘과 동일시 여겼던 고대의 전통에서 출발한 셈이다. 작가 수에토니우스는 ‘12황제 전기(The Lives of the Twelve Caesars)’에서 로마 네로 황제 시대 건축물의 천장을 천체의 운동을 모방한 둥근 천장이라 표현했다. 그 천장은 푸른색으로 칠해져있었고, 별 모양의 장식을 만들어 넣었으며 심지어 천제가 움직이는 방식으로 천천히 회전운동까지 했다고 한다. 또 중세 성당의 돔 천장은 푸른색으로 칠해져있었고 금빛 별과 태양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대저택에는 구름과 천사들이 그려진 천장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요즘은 천장에 구름과 천사를 그려넣거나 푸른색으로 칠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전통의 흔적이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천장의 몰딩이다. 집이나 사무실 천장 둘레의 테두리에 둘러놓는 벽과 천장을 분리해주는 몰딩은 본디 천장에 칠해진 푸른색의 경계, 천장에 그려진 하늘 그림의 경계에 있던 복잡한 테두리의 흔적이다. 지금의 장식에 불과한 몰딩에서 천장과 벽을 분리해준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를 더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원래의 의미는 천장에 만들어진 하늘과 현실을 구분해주고 인간의 집과 집안으로 들여온 하늘을 한계짓는 상징적인 장식품이었던것이다. 천장의 모양은 보통 다섯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평평하고 곧게 뻗은 평지붕, 위쪽이 뾰족한 5각형 벽을 만드는 박공지붕, 박공지붕보다 양쪽 끝이 좁고 벽 위에 면구조가 하나 더 있는 모임지붕, 원뿔이나 원형으로 만드는 방형지붕, 한쪽으로 치우친 천장과 마름모형 벽이 특징인 외쪽지붕이 있다. 균일한 공간을 만드는 천장은 안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을 주며 형태에 따라 공간을 구분해 주거나 비례감과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면적이 좁은 공간을 넓고 탁 트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천장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원리로 천장이 가진 높이 차이를 완만하게 조절해 사용자의 감각을 서서히 전환시키거나 극적으로 차이를 크게해 감각을 환기하는 장치로 쓰기도 한다. 중세에 세워진 교회나 성당은 대부분 크고 높은 돔 형태로 지어졌다. 이 크고 높은 돔 천장은 궁핍한 일상과 삶을 상징하는 어둡고 긴 복도와 함께 신자와 방문자들에게 격정적인 감동을 선사했다. 좁고 낮은 복도를 지나 거대한 공간감과 개방감을 가진 천장 아래의 홀에서 사람들이 경외감과 신성함을 느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잘 기획된 놀이공원이나 미술관에서 이런 장치를 흔하게 볼 수 있다. 2007년 미국 라이스 대학교(Rice University, Texas, U.S.A)에서 있었던 실험에 의하면 천장의 높이가 높아질 수록 공간 사용자의 창의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반대로 천장의 높이가 낮아지면 사용자의 집중력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사무실 환경 조성에 활용하는 기업들이 많다. 병원이나 상업공간에서는 공간의 목적과 사용자에 따라 전략적으로 공간을 구성한다. 구글의 본사인 구글 플렉스(Googleplex)는 직원들의 추상력과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 천장을 높이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 아이를 키우고있다면 아이방을 어떻게 꾸며줄지, 어떤 아이로 키울지를 결정하기에 앞서 우선 천장의 높이를 확인해보자. 기사 노일영

화려한 성취의 갤러리 거실

오래전 집의 모든 공간이 하나의 커다란 방이었을 때에는 부엌과 침실, 거실과 구분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거실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부엌과 침실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당시에는 거실에서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따듯한 불 주변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잠을 청했다. 집이 거실이었고 모든 일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때로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을 맞이하는 곳도 역시 거실이었다. 손님 역시 거실에서 함께 밥을 먹었고 그곳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말 그대로 다용도 거실이었던 셈이다. 17세기 즈음, 집을 여러 개의 특화된 목적을 가진 공간으로 구획하고 나누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다용도 거실에서 다양한 방(Room)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침실과 주방, 응접실 등 다양한 방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 와중에 우리가 오늘 흔히 거실(Living Room)이라고 부르는 공간도 나타났다. 보통 응접실이라 불리었던 당시의 거실은 지금의 거실과는 다소 다른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다만, 적어도 겉모양은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집이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면서 이전의 다용도 거실에서 여러 가지 공간과 기능들이 분리되었다. 침실과 부엌이 각자의 기능에 맞게 분리되어 나갔고 이어서 다양한 이름과 형태를 가진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응접실은 현대의 거실과 비슷하게 탁자와 의자가 있는, 손님과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할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사람들은 자신이 머무르는 곳보다 손님에게 보여줘야 하는 공간을 꾸미는 일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그래서 응접실은 다른 공간보다 특별히 더 장식되었고 신경 써 꾸며졌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응접실은 일종의 전시장이었다. 집안과 가장의 내력과 실력, 전통과 성취를 집약해 장식하고 치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안의 가보를 전시하거나, 빼어난 예술 작품을 걸어놓기도 했으며, 태피스트리와 같은 장식물로 공들여 치장했다. 그런 까닭으로 응접실은 점차 집안의 바깥주인을 상징하는, 무겁고 남성적인 공간으로 발전했다. 침실이 집안의 안주인을 상징하는 여성적인 공간으로 내밀하게 발전한 반면, 응접실은 그와는 대조적인 개방적이고 화려한 공간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주택에는 응접실이나 담화실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손님을 맞이하거나 휴식을 즐길 공간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시작된 응접실의 의미는 바로 그곳에서 드러난다. 온종일 노동에 전념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장식과 사교를 위한 공간이 바로 당시의 거실 즉, 응접실의 의미였다. 응접실의 존재 자체가 집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공간이었으며, 기능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응접실은 곧 집안과 가장의 권위와 권력 그 자체로 여겨졌다. 이후 도시가 발전하고 저택이 아닌 주택이나 아파트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늘면서 응접실은 규모와 수가 크게 줄었다. 대부분의 도시 가정에는 하나 혹은 두 개의 응접실만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비교적 출입구에 가까워 손님을 맞이하기 편한 방 하나를 꾸미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값비싼 가구와 화려한 장식품들이 가득한 응접실 즉, 보다 현대적인 의미의 거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비록 그 규모와 수가 줄었지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이었으므로 당연히 크고 화려하게 꾸며졌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새로운 디자인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17세기에 시작된 화려한 응접실 문화와 양식이 순식간에 밀려났다. 모더니즘이 등장한 것이다. 20세기의 현대적 주택은 실용적이고 단순한 주거용 기계에 가깝게 여겨졌다. 장식과 치장은 최소로 줄었고 기능성이 강조되었다. 화려한 실내 장식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놀랍게도 투명한 유리였다. 모더니즘은 풍부한 자연광을 거실로 끌어들였다. 여전히 아파트나 주택의 거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커다란 유리와 풍부한 자연광은 20세기 모더니즘의 상징인 것이다. 모더니즘의 등장만큼이나 거실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TV의 등장이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꾸며지던 공간에서 TV를 보기 위한 공간으로 급격하게 그 의미가 변화한 것이다. 손님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차를 마시던 공간에서 지금은 TV를 보기 위한 곳, TV를 보면서 쉬는 곳, TV를 보면서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 요즘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거실에 놓이는 의자 즉 소파는 벽을 등지고 빈 벽을 바라보게 배치되곤 한다. TV의 등장이 바꿔놓은 생활 양식이다. 서로를 향해 놓였던 의자들은 이제 동시에 같은 곳을 본다. 예나 지금이나 거실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는 의자다. 의자는 휴식을 취할 때나 편지를 쓸 때 반드시 필요했고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실질적인 다양한 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요즘엔 거의 편하게 TV를 보기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받지만 말이다. 중세 유럽의 주택에서는 오직 집주인만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푹신푹신한 소파가 아니었음에도 아무나 함부로 의자에 앉을 수없었던 것은, 의자에서 하는 많은 행위들, 책을 읽는 일과 편지를 쓰는 일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일들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푹신한 소파는 원래 아라비아에서 건너간 귀족적이고 호사스러운 사치품이었다. 17세기의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와는 다르게 소파는 푹신푹신했고 다양한 자세로 편히 쉴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응접실에 소파를 두는 것은 좋은 자랑거리였고 재력을 가진 이들은 앞다퉈 응접실에 소파를 놓았다. 더이상 거실이 전시장이 아니고 소파가 사치품이 아닌 이제는 대부분의 집에 소파가 놓여있으며 누구나 쉽게 소파에 앉을 수 있다. 심지어 남의 집 거실의 소파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거실의 겉모양은 예전과 비슷하지만, 의미가 달라진 덕분이다. 거실과 주방, 식당의 구분이 모호한 현대적 오픈 플랜식 주택은 193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해 1950년대에 점차 일반 가정에 널리 적용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나뉘기 시작한 다양한 방들이 다시 합쳐지는 데에는 아주 긴 시간과 다양한 기술의 발전이 필요했다. 모닥불이나 화로 대신 보일러와 라디에이터가 들어섰고 연기와 냄새를 만들어내던 주방에는 전자렌지와 환풍기가 생겼다. 딱딱한 나무의자 대신 안락한 소파가 들어섰으며, 어릿광대나 음유시인 대신 TV가 들어섰다. 거실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지금의 양식과 문화도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다. 기사 노일영

생활에 표정을 만드는 창문

“널 향해 창을 내리, 바람 드는 창을” 산울림이 부르고 아이유가 다시 부른 노래 ‘너의 의미’에서 창문은 대화와 연결, 사랑과 관계의 의미로 등장한다. 노래 가사가 아닌 일상에서의 창문 또한 실로 그렇다. 창문은 소통과 관계의 상징이고 바람은 물론 빛과 의미, 심지어 마음이 통하는 통로이다. 뿐만 아니라 종종은 삶과 생활을 투영하는 액자가 되기도 하며, 건물과 거리에 리듬을 만들어주거나 생활에 표정을 더하기도 한다. 건축 요소, 인테리어 디자인 요소로서의 창문은 단순한 ‘구멍’ 그 이상이다. 잘 느껴지지 않지만, 창문은 건축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다. 모든 건물에 창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집에는 창문이 있다. 심지어 컨테이너 박스조차 ‘집’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면 창문을 만들어 넣는다. 적어도 창문이 있는 건물이라면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창문이 이렇게도 건축과 생활에 중요한 이유는 창문이 소통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실내와 실외의 사이에서 소통과 경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소통과 경계의 창구이면서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초라한 집에서조차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창문이다. 창문이 소통과 경계의 창구인 것은 몸이 문을 넘어 실내로 들어가기 전 혹은 몸이 문을 넘어 실외로 나가기 전에 이미 시선이 창문을 통해 실내로 혹은 실외로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건물을 가더라도, 어느 건물에서 나가더라도, 몸보다 먼저 시선으로 경계를 넘어가곤 한다. 같은 이유로 가장 초라한 집에서도 가장 먼저 창문을 통해 실내를 살피게 된다. 창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로 창문(Window)은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빈드(Vind, 바람)와 아우가(Auga, 눈)가 합쳐진 말이다. 풀이하자면, ‘바람 눈’이 될 것이다. 눈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일까, 창문은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친절해 보이는 표정이 있기도 하고 가끔은 새침데기 같아 보이는 표정이 있기도 하다. 다양한 표정의 건물이 모인 거리는 그래서 리듬감이 있고, 활기가 넘친다. 반면, 똑같은 표정을 지은 건물들은 그래서 지루하거나 가끔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처음부터 창문이 지금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불을 피울 때 생기는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지붕에 작은 구멍을 뚫은 것이 인공적인 창문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흔하게 쓰이는 오큘러스(Oculus, 눈・둥근 창)가 창문의 첫 형태였던 셈이다. 처음 창문을 만들자, 매캐한 연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고, 낮이면 따듯한 태양 빛이 들어왔다. 처음부터 창문은 실내와 실외의 바람과 빛이 소통하는 창구로 시작했다. ‘바람 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어쩌면 이런 까닭 때문일지 모르겠다. 초창기의 창문은 벽에 난 단순한 구멍이었고 기껏해야 가죽이나 나무로 덧대어 놓은 정도였을 것이다. 아직 유리를 세공하는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고, 건물을 지탱하는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창문은 단순히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핸드 블로잉(Hand Blowing) 기법으로 투명한 유리를 세공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유리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만들어진 유리창은 유리병의 바닥을 잘라 벽에 끼워 넣는 형태였다. 17세기, 커다란 판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창문에 새로운 역할이 더해졌다. 빛과 바람이 통하는 통로에 더해서 조망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생긴 것이다. 창을 통해 실내에서 실외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창문은 거의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됐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실외의 풍경을 실내의 장식적 요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매력으로 한껏 몸값을 올린 서울 아파트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이 새로운 기능과 역할의 가치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에서는 오르내리창(Double-hung Window, 내리닫이창)이 많이 쓰였고 나머지 유럽과 그 외의 지역에서는 여닫이창(Case Window) 이 일반적이었다. 오르내리창은 단열에 유리하고 여닫이창은 환기에 유리하다. 창문의 형태가 각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맞게 발전한 덕분이다. 최근에는 시스템 창이라는 이름으로 창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형태가 많이 쓰이고 있다. 지역의 기후나 환경과 관계없이 냉난방 효율과 추락사고 방지의 목적이 가장 크다. 한국의 창문은 봉창, 바라지문 등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발달하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미닫이창(Sliding Window)이 발전하기도 했다. 미닫이창은 여닫이창과 오르내리창의 장점을 고루 갖췄다.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에도 적합하고 추운 겨울에도 적합하다. 창살만 있고 유리나 종이로 덮지 않아 지속적인 환기와 채광을 추구한 봉창과 여름에는 활짝 위로 제쳐서 열어 두었다가 겨울에는 내려서 벽처럼 쓰기도 한 바라지문은 한국의 기후와 환경에 최적화된 형태이다. 건물을 지탱하는 벽에 구멍을 뚫으면 당연히 벽이 약해지고 건물이 무너질 수 있으므로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인방보(Lintel)라는 방법이 개발됐다. 이 방식의 한계는 창문을 가로로 길게 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세로로 창을 길게 내는 기술이 발전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벽이 아닌 기둥으로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도미노 시스템’을 제안한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창문이 가로로 길어질 수 있었다. 우리에겐 익숙한 가로로 긴 창은 그래서 근대 건축의 상징이기도 하다. 르코르뷔지에의 파격적 선도로 창문을 벽 자체만큼이나 크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통유리벽이라는 창문과 벽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결국 창과 벽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허물어진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우리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창은 벽 안으로 축소되었고, 심지어 최근 들어 점차 더욱 축소되는 추세이다. 다만, 최근의 추세는 실내와 실외 사이의 경계의 문제가 아니라 단열과 에너지 소비의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창문은 각 방은 물론 건물 전체의 냉난방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동안은 조망과 채광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고자 건물 외피의 대부분을 유리로 두르는 통유리벽(All Glass Curtain Wall)이 유행했다. 이런 방식은 조망과 채광에는 유리하지만, 실내 온도 유지에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건물 외부에 유리 대신 단열 성능이 우수한 재료가 사용되고 창문이 다시 작아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알루미늄 새시는 점차 시스템 창호로 바뀌고 있다. 모두 건물의 냉난방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들리야르는 “창문은 더 이상 공기와 빛의 출입에만 필요한 구멍은 아니다.”고 말했다. 보통 창은 실내와 실외를 나누는 문으로서, 채광과 환기를 위한 빛과 바람의 출구로만 여겨졌지만 실은, 우리가 이제껏 눈치채지 못 한 더 많은 기능과 의미가 담겨있다. 예술적으로 기능적으로 심지어 철학적으로까지 창의 역할은 다양하고, 그 의미가 깊다. 햇살 좋은 날 혹은 비가 창을 두드리는 날 아니면 찬 바람이 창을 스치는 날, 그 의미를 생각하며 창을 통해 전해지는 빛과 공기를 느껴보자. 기사 노일영

실용과 화목의 수호자, 주방

주방은 본질적으로 식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정하게 요리하는 부부와 식탁에 둘러앉아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이 주방을 상징하는 이미지인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주방은 따듯하며 온화한 가정성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진다. 집의 중심부이자 일차적인 소통의 공간으로 온 가족이 모이는 거의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주방이 하인들만 드나드는 하찮은 공간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은 거의 잊혀졌다. 인류가 처음 자연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을 때에는 주방과 침실의 구분이 없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집에 가까운 그 공간의 중심부에는 불이 있었다. 난로, 화로, 모닥불 뭐라고 부르든 공간의 중심에 불이 있었고 그 불로 요리를 하고 몸을 녹이고 불을 밝혔다. 유럽에서는 중세까지도 집안의 중앙 홀에 불을 피웠다. 하인들은 그곳에서 요리를 했고, 밤이면 추위를 피해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과 가장 다른 것이 있다면 요리를 하던 하인들이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사실 오랫동안 주방에서 요리를 담당했던 건 남자였다. 특히 왕실이나 귀족의 주방을 책임진 주방장과 그들이 부리던 이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17세기 들어 시민계급이 성장하면서 남자들이 의사나 법률가 같은 더 주체적이고 매력적인 직업을 찾아 주방을 떠났다. 일부 왕실과 고위 귀족의 요리를 책임지던 소수의 최고급 남자 요리사만이 주방에 남았고, 결국 주방은 음식점과 여성의 몫으로 넘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택의 중심 공간이었던 주방은 점차 주택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화재의 위험이었다. 불은 요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주택의 중앙에 자리 잡은 모닥불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주택을 통째로 잃어야 했기 때문에, 주방은 점점 주택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벽난로와 화로, 난로의 발전으로 체온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진 탓도 있다. 화재에 대한 공포는 결국 주방을 집 밖으로 쫓아내게 만들었다. 귀족의 저택이나 궁전에서 마침내 주방을 따로 지어진 건물로 쫓아낸 것이다. 이런 조치를 통해 혹시라도 화재가 났을 때 다른 건물에는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밖으로 쫓겨난 주방에서 점점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식료품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 우유를 짜거나 치즈를 만드는 낙농장, 양조장, 탈곡장, 제빵소 등 실로 다양한 기능과 목적이 주방으로 집중됐고, 주방은 거의 작은 마을로 보일 정도로 커지기도 했다. 밖으로 쫓겨난, 좋게 말해 독립적인 주방은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도 여전히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 했다. 특히 주인의 신분이 높을수록 주방과 저택의 거리는 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방을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쓰레기가 많이 나는 곳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품격있는 자신들의 생활 공간과 주방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18세기는 본격적으로 도시가 발전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늘어난 인구에 걸맞은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도시 사람들은 마침내 주방을 건물의 지하로 쫓아냈다. 19세기까지 품격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 지하와 밖으로 쫓겨나기만 했던 주방은 20세기에 들어 다시 주택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로 부활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노동인구가 줄고 인건비가 올랐기 때문이다. 주방에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않던 가정의 안주인도 이제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해야 했다. 또 다른 중요한 원인으로는 환풍기의 발전을 들 수 있다. 환풍기의 등장과 발전으로 불쾌한 음식 냄새가 집 안으로 퍼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도시형 공동 주택을 시작으로 작은 공간 안에 주방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가정부와 하인의 공간이었던 주방이 드디어 주부의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0세기 들어 높아진 주방의 위상은 다른 공간과 주방의 조화를 만들어냈다. 1960년대 영국에서는 예전 양식의 도시형 연립 주택을 개조하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식기실, 주방, 식당 사이의 벽을 허물어 여러 개로 나뉜 주방 공간을 하나로 합쳤다. 바로 현대적인 오픈 플랜식 디자인의 등장이었다. 이 새로운 그러나 역사적인 공간의 구조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가족 구성원들이 주방에 드나드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되었으며 주방을 더럽거나 품격이 떨어지는 공간이라고 인식하지 않게 된 것이다. “식사 공간을 종일 사용할 수 있도록 거실과 식당, 주방과 식당을 조합하는 방식의 가치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디자인 브랜드 해비타트가 자신들의 주방 용품을 홍보하기 위해 사용한 문구다. 1970년대의 주방은 구조적으로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벽돌, 나무와 같은 재료로 주방을 꾸미기 시작했고, 정직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풍겼다. 튼튼하고 실용적이지만 소박한 멋이 있는 식기가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 ‘시스템 키친’이라는 개념이 처음 들어온 시기, 1980년대에 주방은 다시 예전처럼 거실과 그리고 식당과 하나가 되었다. 부유한 집주인들은 주방에 많은 돈을 쓰기 시작했다. 값비싼 가구, 주방용품과 최신 기계들은 주방에 실용성과 심미적 아름다움을 더했다. 주방은 점차 세련되고 모던해졌으며 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많은 돈을 써서 만든 화려하고 미끈한 주방은 오히려 집주인이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싼 주방의 주인들은 보통 직접 요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주방의 최우선 가치는 실용과 효율이었다. 불을 다루고 음식을 만드는 주방은, 일종의 기관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승객이 아닌 선원이 가는 곳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방은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작업, 요리가 이루어지는 실용적인 곳이며 동시에 온화하고 단란한 가정을 상징하는 따듯한 공간이 되었다. 냉장고에 붙어있는 가족사진과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는 가스레인지가 바로 지금의 주방을 대표하는 장면일 것이다. 냉장고라는 실로 차가운 기계에 붙여진 행복한 가족사진이야말로 주방 그 자체다. 기사 노일영

꿈꾸는 작은 우주, 침실

인생의 3분의 1은 잠이다. 인류 역사의 3분의 1도 우리가 자는 동안에 지나갔다. 그래서 역사의 3분의 1은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이기도 하다. 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이루어진 곳은 주로 침실이었고, 우리가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는 곳도 침실이다. 침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삶의 커다란 일부를 이야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낯설고 심지어 수줍기도 하다.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적이고 내밀하며 신성하기 때문이다. 매일 따뜻한 잠자리와 먹거리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시기에 잠자리는 외부의 위험과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공간 즉 현대적 의미의 집 그 자체였다. 잠자리가 있는 곳이 집이었고 집이 잠자리였다. 이 시기에 인류는 출생에서 임종까지 인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공간에서 보냈다. 잠을 자고 음식을 먹는 기본적인 생활부터 아이를 낳거나 임종을 맞이하는 일생일대의 모든 사건이 한 장소에서 일어났다. 공간이 목적과 기능에 따라 분리되기 전까지 침실과 거실과 부엌은 모두 하나였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모든 사건이 벌어졌으며, 모든 문제가 일어났고 또 해결됐다. 침실이라는 이름과 그 개념은 사생활이라는 말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중세시대까지 사생활이라는 개념은 존중받지 못 했다. 집안의 거의 모든 식솔들은 커다란 주택의 한가운데 넓은 공간에 모여서 함께 잤다. 불을 피워두곤 했기 때문에 연기와 냄새가 가득하고 불편했겠지만, 적어도 온기와 안전을 위해서는 함께 모여서 자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보다는 공동체가 더 중요했고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즈음 오늘날 침대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귀족이 아닌 이들은 보통 맨바닥에서 잤다. 이때의 침대는 많은 이들이 함께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컸다. 침대가 만들어지자 침대에서의 규칙과 예절이 생겨났다.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서 잠을 잤기 때문에 사적이라기보다는 공용의 성격이 짙었다. 침대에 눕는 순서가 관습적으로 정해졌고 침대를 관리하는 일이 중요한 일과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불편했겠지만 적어도 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푹신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들이 맨바닥에서 함께 모여 잠을 잤지만, 귀족들은 진작부터 따로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지금 보기에는 다소 조잡한 침대를 만들고 침대 주변에 네 개의 기둥을 만들어 커튼을 두르곤 했다. 당시의 침대라고 해봐야 건초나 짚을 채워 넣은 자루일 뿐이었지만 온기를 지키기에는 바닥보다 훨씬 좋았다. 침대 주변에 두른 커튼은 사생활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겠지만, 오히려 외부의 찬 공기를 막기에 더 좋았다. 어쨌든 덕분에 조잡하나마 부유한 부부는 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었고 둘만의 사생활을 가질 수 있었다. 은밀한 공간은 딱 침대 만했다. 당시에 귀족들이 침대를 놓던 곳을 침실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무실, 서재, 거실, 침실의 기능을 합친 다목적 공간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귀족들이 신분이 낮은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방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2층 저택의 2층을 통째로 쓰는 것이었다. 여전히 집 전체가 방 하나로 여겨졌고 침실이 아닌 침대만 있을 뿐이었다. 사생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시기였던 만큼 귀족들조차 ‘남몰래’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모든 생활은 공개적이었고 사회적이었다. 17세기에도 여전히 침대는 모두의 것이었고 침실은 특별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다 17세기의 막바지에 복도가 등장하면서 모든 방과 방이 나뉘고 독립적인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방을 특별한 기능으로 나누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잠을 자는 공간인 침실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사회적 성격이 남아있었다.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각종 업무를 보는 등의 기능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채 침실에 남아있었다. 카드놀이와 다도를 즐기는 곳도 침실이었다. 침실이 오로지 취침만을 위한 곳이 된 것은 한참 후에 일어난 일이다. 18세기, 프랑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은 베르사유 궁전을 개조해 곳곳에 작은 방을 만들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이렇게 만들어진 방들을 섬세하게 장식했다. 충분히 여성스러운 분위기, 조개 무늬와 소용돌이 무늬, 이국적인 벽지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이 방은 사용하는 이의 품위를 지키고 사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침실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방들과 그 장식들은 훗날 ‘로코코’라 불리는 양식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퐁파두르 부인이 만들어낸 침실은 사실 취침보다는 다른 목적을 주로 갖고 있었다. 때문에 지극히 여성적이고 아주 내밀한 공간이었다. 이 특색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성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으로 발전한 침실이 가정에서 가장 특별하고 고급스러우며 섬세한 공간이 된 것이다. 최신형 TV와 값비싼 오디오, 커다란 소파와 거대한 장식품 등으로 과시적인 남성성을 드러내는 거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침대 주변의 가족사진과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이 공간의 사적 내밀함과 신성함을 잘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침실을 부인, 아내와 특히 연관 지어 이해하곤 했다. 19세기는 고전적 보수주의와 도덕주의, 화려한 양식과 산업 발전의 시기였다. 건축과 가구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정교해졌다. 이 시기에 드디어 침실이 오직 취침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성과 여성을 엄격히 분리하던 사회적 분위기 탓에, 남자와 여자가 같은 침실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남자 하인과 여자 하인의 잠자리가 따로 만들어졌고 마찬가지로 상류층의 남편과 아내가 한 침대를 쓰는 것, 나아가 한 침실을 쓰는 것조차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덕분에 20세기 초까지도 중류층 부부들은 한 침실에 두 개의 1인용 침대를 놓곤 했다. 20세기 초 할리우드 영화에 침실이 등장하기 전까지 침실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침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침실은 욕망의 상징으로 대두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당시의 영화들은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욕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 침실은 부드러운 실크 잠옷과 호사로운 새틴 재질의 나이트가운을 걸친 스타들의 공간, 화려한 소품과 고급스러운 가구가 놓인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영화를 본 여성들은 영화나 영화배우보다 그들의 침실에 더 주목했다. 사실 침실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침실에 중요한 위상이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침실이 본격적으로 다른 공간들과 분리되어 사적인 공간으로 취급된 것이 불과 19세기의 일이다. 이전까지 수면을 목적으로 한 특별한 공간은 필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 모든 공간은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이었다. 그러다 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쉬는 일, 먹는 일,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거나 혹은 파티를 즐기고 잠을 자는 등의 모든 일들을 위한 각각의 독립적인 방이 생겨났다.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침대가 있는 독립적인 방이라는 개념의 침실은 실은 굉장히 근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침실에서 아이를 낳거나 임종을 맞이하는 일은 더이상 익숙한 일이 아니다. 이제 그런 중요한 사건들은 침실을 벗어나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침실의 역할이나 중요성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가 침실에서 잉태되는 까닭이다. 집 자체였던 침실이 집의 일부로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집이라는 완충지대가 덕분에 침실은 더욱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됐다. 침실은 집 안의 집, 내부의 작은 우주가 되었다. 이 작은 우주가 수면과 또 부부만의 시간과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침실은 진정 행복한 곳,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꿈꿀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기사 노일영

지성과 감성 사이, 서재

벽과 문으로 구분되는 가정 내의 많은 공간 중에서도 서재는 가장 지성적이고 내밀한 공간이다. 누군가의 서재를 상상해보자. 서재에는 주인의 존재를 정의하는 물건이 가득할 것이다. 책장에 꽂힌 도서들은 주인의 관심사와 지적 수준을 드러낼 것이고 장식품과 예술 작품은 주인의 취향과 추구하는 미적 지향을 보여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서재는 가정 내의 다른 공간과는 다르게 일, 업무와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모바일오피스, 홈오피스가 보편화된 요즘에는 집 안에 업무를 위한 공간을 따로 두거나 집 안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지만, 사실 이런 경향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유럽에 처음 서재가 등장한 것은 15세기 무렵이었다. 부유한 귀족들이 침실과 가까운 곳에 방을 따로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고 귀중품을 보관하면서 별실이라는 공간이 생겨났다. 침실보다도 더 내밀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별실은 주로 기도를 하거나 독서, 명상을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지극히도 사적인 용도로 쓰이던 별실은 곧 남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취향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진귀한 예술품이나 보석, 악기나 서적 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별실이 처음 생겨나던 15세기에 73권으로 만들어진 성경 1질을 사기 위해서는 집 10채 값의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 개인이 다양한 서적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연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세의 막바지에 이르러,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도서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개인이 서적을 손쉽게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집 안에 전용 별실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이들은 때마침 불어닥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지식과 학문을 탐닉하면서 다량의 서적을 수집했다. 가격이 내려갔지만, 여전히 귀했던 책들은 별실로 옮겨져 보관됐다. 어떤 이들은 은밀하게 장부를 작성하거나 돈을 계산하기 위해, 또 어떤 이들은 사적인 편지나 일기를 쓰기 위해 이 별실을 애용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취미를 즐기거나 내밀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별실은 완벽한 장소였다. 이 매력적인 공간은 점차 화려하고 멋지게 꾸며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그림과 장식품으로 채워지기도 했고 다양한 종류의 양서가 벽을 채우기도 했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점차 별실은 현대적 의미의 서재가 되거나 갤러리, 혹은 창고로 변하기도 했다. 현대적인 의미의 서재가 탄생한 것은 어쩌면 구텐베르크에게 가장 큰 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세가 끝나가고 근세에 접어들 무렵, 도서의 대량보급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지식인 계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은 작고 조용한 방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유례없이 고독과 사색을 즐기는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작고 내밀하며 충분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공간, 사색과 사유의 공간으로서의 서재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의 지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서재는 전통적으로는 서적, 현대적으로는 컴퓨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 장부를 정리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 컴퓨터 앞에 앉아 하는 행위 등이 모두 업무, 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서재는 집안에 들어선 사무실이기도 하다. 가장 내밀한 공간인 동시에 업무를 처리하는 공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분리된 완벽한 도피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서 업무를 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독특한 공간이 바로 서재다. 골치 아픈 여러 문제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내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 일상생활과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서재는 요즘 들어 그 역할이 크게 축소됐다. 홈오피스의 보편화로 서재의 역할이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책장과 책상이 있던 독립된 방은 아예 집 안에서 사라져버리거나 혹은 일상과 업무가 혼재된 기이한 공간으로 변했다. 책장과 책상은 점차 노트북과 와이파이로 대체됐다. 단, 고독과 사색은 대체되지 않은 대신 거의 사라져버렸다. 공간이 귀한 소형 아파트나 원룸에선 책상 대신 다용도 테이블을 놓고 식탁, 책상, 작업 테이블 등 다양한 용도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책장 대신 장식장이나 선반을 두기도 하며 책장을 장식장으로 쓰기도 한다. 책의 역할과 가치가 축소된 만큼, 서재도 축소되거나 사라져 서재의 기능이 집 전체로 흡수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집 전체가 일하는 공간으로 변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집에서 책을 보는 사람보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홈오피스의 대중화는 집을 휴식하는 곳이 아닌 일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거실 한편에 테이블과 노트북을 놓고 일하는 이들도 있고 침실이나 작은 공간에 파티션이나 커튼으로 공간을 분리해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집 안에 작업 공간을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일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일의 무게를 함께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과 휴식, 업무와 여가의 사이에 일이라는 무거운 짐을 들이려 한다면 신중해야 한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말은 여가시간을 일로 보내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방과 침대방을 따로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따로 주는 것이 좋다. 책장과 책상이 있는 공부방은 아이가 스스로 공부와 휴식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균형을 잡을 줄 모른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노동과 휴식 사이의 균형은 사적 공간과 공적공간, 서재와 집 전체 그리고 업무와 여가 사이의 균형과도 같다. 포근하고 안락해야 할 집을 일만 하는 공간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서재라는 균형이 필요하다. 기사 노일영